조운선(漕運船)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사용된 화물 운반용 선박으로, 각 지방에서 조세의 명목으로 거둬들인 곡물(세곡)을 수도로 운송하는 데 사용된 관용(官用) 선박을 가리킨다. 조운(漕運)이란 전근대 시기에 각 지방에서 조세로 납부되는 곡물을 조창(漕倉)에서 수납한 뒤 선박에 적재하여 수운(水運)으로 중앙의 경창(京倉)에 운송하는 제도로, 조운선은 이 제도의 핵심적 운송 수단이었다.
조운선의 사용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곡물 운반선인 초마선(哨馬船)은 약 1,000석의 곡물을 운반할 수 있는 크기였으며, 조선시대의 조운선 역시 이와 유사한 규모였다. 현재 전해지는 조운선의 제원은 조선 후기의 것으로, 18세기에 제작된 《각선도본》의 기록과 발굴된 유물을 종합할 때 경하중량(輕荷重量) 약 41톤의 목선으로, 쌀 약 53톤(1,000섬)을 운반할 수 있었으며 선원과 항해 도구 등을 감안한 재화중량(載貨重量)은 약 96톤으로 추정된다.
조선 초기의 조운선 건조는 국가가 주도하였다. 태종은 즉위 직후 251척의 조운선을 건조하였고, 1413년(태종 14)에는 80척을 추가로 건조하였다. 이후 세조 시기에도 전라도의 변산과 완도에서 100척이 건조되었다. 건조된 조운선은 대략 6년마다 수리하고 다시 6년이 지나면 개조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며, 선박의 수명은 약 20년 내외였다. 조선 초기에는 관이 주도하여 건조하였으나, 후기로 갈수록 민간에서 건조한 조운선(사선)이 많이 활용되었다.
조선은 수운을 이용하기 용이한 중부 및 남부 지방의 요지에 조창을 세우고 세곡 운반을 담당하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개의 조창이 설치되었고, 조선 전기에는 9개, 조선 후기에는 8개의 조창이 운영되었다. 조운선은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삼남(三南) 지역에서 거둔 세곡을 실어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한강 유역의 경강(京江)에 집결시켰다. 이로 인해 경강 일대는 새로운 상권의 중심지로 부상하였고, 경강상인(京江商人)이 상권을 주도하게 되었다.
대동법 시행 이후 모든 조세를 곡물로 수납하면서 기존의 조운선만으로는 물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민간의 선박을 동원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조선 후기에는 조창에 소속된 관선 대신 각 고을 소유의 지토선(地土船)이나 민간 선박, 그리고 주교선(舟橋船), 훈국선(訓局船) 등도 조운에 활용되었다.
조운선의 운항과 관련하여, 조선시대에는 각 조창별로 조운선의 배치 수가 규정되어 있었다. 『대전회통』에 따르면 19세기 초반에는 아산 공진창에 15척, 함열 성당창에 14척, 영광 법성창에 29척, 옥구 군산창에 23척, 경상도의 마산창과 가산창에 각 20척, 밀양 삼랑창에 15척이 배치되었다. 조운선에는 사공(沙工) 1명과 격군(格軍) 15명 등 총 16명의 조졸(漕卒)이 기본 인원으로 탑승하였으며, 1척당 평균 20명가량이 승선하였다. 조운선은 1척당 1,000석을 한도로 세곡을 적재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이를 초과하여 적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운선은 운항 중 침몰한 유물들이 발굴되어 그 구조가 연구되었으나, 온전한 선체가 보존된 것은 없다. 2011년에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서 조선시대 조운선 복원사업이 시도되어 전통 선박 기술의 보존과 전승을 위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조운선은 한국 전통 선박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선박으로, 일부 연구자들은 이를 한국 선박의 뿌리로 평가하기도 한다.
조운 제도는 19세기 말, 조세의 금납화(金納化) 확대와 화폐 유통의 활성화로 인해 세곡 운송의 필요성이 감소하면서 소멸하게 되었다. 조운선의 사용도 이와 함께 종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