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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군정부

조선혁명군정부(朝鮮革命軍政府)는 1934년 11월 11일,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단체인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 행정조직 국민부(國民府)와 군사조직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통합하여 수립된 군사정부이다. 1938년 9월까지 존속하였으며, 만주 지역에서 활동한 마지막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정부로 평가된다.

개요

조선혁명군정부는 1931년 만주사변 이후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 종래의 당·정·군 삼분 체제(조선혁명당-국민부-조선혁명군)가 유명무실해지고 군사조직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수립되었다. 행정과 군사 기능을 통합하여 항일무장투쟁과 한인 교민 자치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고자 한 것이 설립 목적이었다.

연원 및 변천

배경

1929년 4월, 남만주 일대의 민족주의 독립운동 단체였던 정의부(正義府)·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온건파 세력이 연합하여 국민부(國民府)를 발족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국민부를 지도하는 정당으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이 창립되었고, 그 산하 군사조직으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 편성되었다. 초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은 이진탁(李振卓)이었으며, 이후 양세봉(梁世奉)이 총사령관을 맡아 활약하였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는 가운데, 조선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1932년), 흥경성 전투(1933년) 등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34년 9월, 총사령관 양세봉이 일제 밀정의 유인에 의해 피살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수립

양세봉의 피살 이후 김활석(金活石, 본명 김탁, 일명 문무경)이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에 추대되었다. 당시 국민부와 조선혁명당의 기능은 크게 약화된 반면, 군의 역할과 비중이 커진 상황이었다. 이에 1934년 11월 11일, 조선혁명당·국민부·조선혁명군의 주요 지도자들이 군민대표자회의를 열고, 국민부와 조선혁명군을 통합하여 조선혁명군정부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조선혁명군정부 선언서≫가 발표되었다.

조직

조선혁명군정부의 조직은 상황에 따라 변동이 있었으나, 1935년경의 주요 조직은 다음과 같다.

  • 통령(統領): 고이허(高而虛, 본명 최용성) → 1935년 9월 김동산(金東山, 본명 김진방)으로 교체
  • 정무원(政務院): 총무 김동산(겸임)
  • 산하 부서: 민사부(부장 김동산 겸임), 법무부(부장 박대호), 재무부(부장 이상관), 교육부(부장 윤일파), 외교부(부장 김두칠), 군사부(부장 김활석, 조선혁명군 총사령 겸임)
  • 군사 조직: 총사령부 아래 3개 방면사(방면군) 또는 3개 사(師) 편성
    • 제1사 사령: 한검추(본명 최석용, 황포군관학교 출신)
    • 제2사 사령: 최윤구(본명 최현구)
    • 제3사 사령: 조화선(본명 조경복)
  • 지방 행정: 10개 군구(軍區)로 나누어 한인 교민 사회를 관할

활동

조선혁명군정부는 정부를 표방하며 다음과 같은 활동을 전개하였다.

항일무장투쟁: 중국 의용군(왕봉각·등철매 부대 등) 및 동북항일연군과 연합하여 남만주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5년 8월에는 통화현 쾌대무자에서 일본군 기병대와 접전하여 적 40여 명을 사살하고 최신 기관총 6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압록강을 넘나들며 국내(평안도·함경도) 진입작전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여 일제 경찰서와 군사시설을 습격·파괴하였다.

한인 교민 자치: 10개 군구를 통해 한인 교민 사회를 관할하며, 호당 연 2원 정도의 의무금을 징수하여 군자금으로 충당하였다. 흉년이나 재산 정도에 따라 징수액을 조정하는 등 신축적으로 운영하였다.

교육 활동: 왕청문 보통학교 등을 통해 비밀리에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조선총독부 발행 교과서의 표지를 붙인 반일 민족교육 교과서를 사용하는 방식으로 일제의 감시를 피하였다.

군기(軍紀): ≪군기 21조≫를 제정하여 민폐를 엄금하고 교민을 보호하는 등 엄격한 군율을 유지하였다. 일본군과 유사한 계급구분과 직제, 훈련을 갖추었으며, 만주국군과 유사한 정규복장을 착용하였다.

쇠퇴와 해체

1936년 10월부터 일제가 '북부동변도 치안숙정 공작'을 대대적으로 펼치면서 조선혁명군정부는 큰 위기에 직면하였다. 1937년 3월, 일·만 군경의 대규모 공세로 본거지인 산채가 함락되고 많은 대원이 전사·체포·귀순하였다. 주요 간부였던 고이허가 체포되어 사형당했고, 한검추·윤일파·김동산 등이 귀순하였다.

1938년 9월 6일, 조선혁명군 총사령 김활석이 제7단장 정창호와 함께 만주국 안동공서(安東公署)에 체포되어 항복함으로써 조선혁명군정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이후 잔여 세력 중 일부(박대호·최윤구 등)는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으나, 1940년경 최윤구가 전사하고 박대호가 체포되면서 완전히 소멸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혁명군정부는 만주 지역에서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며 활약한 최후의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 정부였다. 1930년대 중반, 일제의 대대적인 탄압 속에서도 10여 년간 치열하게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한중 연합작전을 통해 적지 않은 일·만군을 살상하고 만주 및 식민지 조선의 통치를 교란함으로써, 일제의 중국 본토 및 소련에 대한 침략을 일정 부분 견제하는 실질적 전과를 거두었다. 또한 중국 동북 지역과 관내 지역, 그리고 국내의 민족운동과도 연계되어 각 지역의 독립운동을 고조시키는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

조선혁명군정부의 이념과 투쟁 노선은 이후 관내로 이동한 일부 인사들(김학규·최동오 등)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으로 계승되었다.

같이 보기

  • 국민부
  • 조선혁명당 (1929년)
  • 조선혁명군
  • 양세봉
  • 한국독립군
  • 한국독립당 (1930년)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 5 (국사편찬위원회, 1969)
  • 장세윤, 「조선혁명군정부 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1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 장세윤, 「조선혁명군정부」, 『한국독립운동사사전』 6 (2004)
  • 이명영, 『권력의 역사』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滿洲共産匪の硏究』 (滿洲軍政府顧問部, 1937)
  • 김학규, 「30년래한국혁명운동재중국동북」, 『광복』 제1권 4기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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