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조선 시대에 조선 국왕의 명의로 일본의 막부 장군에게 파견한 공식적인 외교 사절단이다. 일반적으로 통신사(通信使)라고도 하며, '통신'은 '신의(信義)로써 통한다'는 의미로, 대등한 국가 간에 파견하는 사절을 뜻한다.
조선과 일본의 정식 국교는 1404년(태종 4)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명나라로부터 일본 국왕으로 책봉을 받고, 조선 역시 명의 책봉 체제에 편입되면서 성립되었다. 이때 조선이 일본 막부에 보내는 사절을 통신사, 일본이 조선에 보내는 사절을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라고 하였다. 통신사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1413년(태종 13)이나 실제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1428년(세종 10) 박서생(朴瑞生) 일행이 처음으로 통신사 명칭을 사용하여 일본에 파견되었다.
조선 전기(1428~1596년)에는 왜구 금압 요청, 장군 습직 축하, 우호 관계 유지 등을 목적으로 총 8회의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이 시기 통신사는 명칭이 회례사(回禮使), 보빙사(報聘使), 경차관(敬差官) 등으로 일정하지 않았으며, 파견 규모도 100명 내외로 비교적 소규모였다. 1590년(선조 23)과 1596년(선조 29)에 파견된 통신사는 임진왜란 전후의 정세와 관련된 중요한 사절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일본과의 관계를 단절하였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정권을 잡은 에도 막부가 국교 재개를 요청해 왔다. 이에 조선은 1607년(선조 40)부터 1624년(인조 2)까지 3회에 걸쳐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명칭으로 사절을 파견하였고, 1636년(인조 14)부터 다시 통신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 통신사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총 12회 파견되었으며, 이 중 1636년부터 1811년까지의 9회는 에도 막부의 새 쇼군 취임을 축하하는 것을 표면적 목적으로 삼았다.
통신사 일행은 정사(正使), 부사(副使), 종사관(從事官)의 삼사(三使)를 중심으로 제술관(製述官), 의원, 화원, 역관, 군관, 악대, 의장대, 사공, 격군 등 400~500명에 달하는 대규모로 편성되었다. 이들은 한양(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까지 육로로 이동한 뒤, 부산 영가대(永嘉臺)에서 해신제를 지내고 선단을 이루어 출항하였다. 쓰시마(對馬島)를 거쳐 오사카까지 해로로 이동한 후, 다시 육로로 교토를 지나 에도(江戶, 현 도쿄)까지 왕복하는 총 4,600km(1만 2천 리)가량의 대장정이었으며, 소요 기간은 6개월에서 1년 정도였다.
통신사는 외교적 임무 외에도 한일 간 문화 교류의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였다. 일본 측은 통신사 일행을 국빈으로 대우하며 성대한 향연을 베풀었고, 통신사 수행원들은 일본의 유학자 및 문인들과 필담창화(筆談唱和)를 통해 시문을 교류하였다. 조선의 유학, 서화, 의학, 음악, 마상재(馬上才) 곡예 등이 일본에 전해졌으며, 반대로 일본으로부터 고구마, 고추, 토마토, 구리, 접부채, 미농지(美濃紙) 등이 조선에 전래되었다.
1811년(순조 11) 마지막 통신사는 양국의 재정 부담과 국제 정세 변화로 인해 대마도(對馬島)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역지통신(易地通信)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이를 끝으로 통신사 파견은 중단되었다. 이후 조일 관계는 소원해졌으며,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의 압력과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양국 관계는 급변하게 되었다.
2017년에는 '조선통신사에 관한 기록-17~19세기 한일 간 평화구축과 문화교류의 역사'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기록물은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등재를 추진한 첫 사례로, 외교 기록, 여정 기록, 문화 교류 기록 등 총 111건 333점으로 구성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