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반니 파토리(이탈리아어: Giovanni Fattori, 1825년 9월 6일 ~ 1908년 8월 30일)는 19세기 이탈리아의 화가이자 판화가로,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미술 운동인 마키아이올리(Macchiaioli)의 지도자 중 한 명이다.
생애
파토리는 토스카나 대공국 리보르노(Livorno)에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상업 관련 자격증을 취득하기를 바랐으나, 그의 그림 실력을 인정하여 1845년 지역 화가 주세페 발디니(Giuseppe Baldini) 밑에서 그림을 배울 수 있도록 했다. 이듬해 피렌체로 이사하여 주세페 베추올리(Giuseppe Bezzuoli)의 지도를 받았고, 같은 해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Academy of Fine Arts in Florence)에 입학했다. 당시 그는 미술 공부보다 우고 포스콜로, 프란체스코 도메니코 게라치, 월터 스콧 등이 쓴 역사 소설을 탐독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1848년에는 학업을 중단하고 반오스트리아 민주주의 운동(1848~49년 혁명)에 참여하여 행동당(Partito d'Azione)의 전단지를 배포하는 배달원으로 활동했으나, 가족의 반대로 군대에 입대하지는 못했다. 1850년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학업을 재개했으며, 항상 작은 노트를 휴대하여 관찰한 모든 내용을 스케치하는 습관을 가졌다.
초기 작품
파토리가 화가로서 성숙하는 과정은 비교적 더뎠다. 그의 첫 번째 그림들은 1850년대 초반에 제작되었으며, 초상화와 베추올리의 영향을 받은 중세 및 르네상스 역사 장면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 남아 있다. 1851년 톰마소 그로시의 단편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일데곤다》(Ildegonda)를 프로모트리체 피오렌티나(Promotrice fiorentina) 전시회에 출품했다. 1853~54년에는 토리노의 화가 안드레아 가스탈디와 함께 리얼리즘을 연구했으며, 이 시기에 첫 풍경화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1850년대 초반부터 파토리는 피렌체의 카페 미켈란졸로(Caffè Michelangiolo)를 방문하기 시작했는데, 이곳은 정치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 활발히 토론하는 예술가들의 모임 장소였다. 이들 중 일부는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방문하여 바르비종 화파(Barbizon school)의 작품을 접하고 야외 사생(plein air) 기법을 이탈리아에 도입했다. 1859년 로마의 풍경화가 조반니 코스타(Giovanni Costa)를 만난 것은 파토리에게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는 동료들과 함께 사실적인 풍경화와 당시 생활상을 야외에서 그리기 시작하여 마키아이올리의 일원이 되었다.
1859년 베티노 리카솔리 정부가 주최한 애국적 전투 장면 경연대회(Concorso Ricasoli)에서 《마젠타 전투의 이탈리아 진영》(Il campo italiano dopo la battaglia di Magenta, 1860~1861년 완성)으로 우승했다. 상금 덕분에 1859년 7월 세티미아 반누치(Settimia Vannucci)와 결혼하고 피렌체에 정착할 수 있었다.
중기 작품(1861~1883년)
1861년부터 1867년까지 파토리는 결핵에 걸린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 주로 리보르노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그는 농민과 시골 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과 초상화를 그렸으며, 마키아이올리 기법의 대가로서 명암과 색채의 대비를 능숙하게 활용했다. 1866년작 《팔미에리의 원형 테라스》(La Rotonda di Palmieri)에서는 기하학적 단순성과 색채가 그림의 구조적 요소로 자리잡았다.
1867년 3월 아내가 사망한 후, 그는 여름을 카스틸리온첼로(Castiglioncello)에서 평론가 디에고 마르텔리(Diego Martelli)와 함께 보내며 풍경화와 농촌 생활을 주제로 한 작품을 다수 제작했다. 1875년에는 프란체스코 졸리, 에지스토 페로니, 니콜로 칸니치와 함께 파리를 방문하여 살롱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카미유 피사로, 페데리코 잔도메네기 등 프랑스 화가들과 교류했다. 그러나 그는 인상파 작품에 대해 열광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며, 바르비종 화파와 에두아르 마네, 카미유 코로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표현했다.
1869년부터 피렌체 아카데미에서 주 2회 강의를 시작했으며, 그의 제자 중에는 훗날 세계적인 화가가 된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Modigliani, 1902년경 등록)도 있었다. 그러나 재정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었으며, 전투 장면 그림이 잘 팔리지 않아 세금을 내지 못해 피렌체의 재산이 압류되기도 했다.
후기 작품 및 판화(1884~1908년)
1884년부터 파토리는 에칭(etching) 제작에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그의 에칭은 혁신적인 기법과 구도로 평가받았으며, 1888년에는 피렌체 아카데미의 상주 드로잉 교수로 승진하고 건축 학교의 인체 소묘 교수로 임명되었다. 1891년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재정난은 계속되어 사립 교습을 통해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말년에 파토리는 이탈리아 통일 이후의 사회·정치 질서에 대해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계속 가르쳤으나 새로운 미술 사조를 받아들이지 않고 전통에 집착했다. 1891년에는 점묘법(divisionismo)에 반대하는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1900년 토리노의 알베르티나 아카데미 회원이 되었고, 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에칭 작품 'Bovi al Carro'로 금메달을 수상했다.
1908년 8월 30일 피렌체에서 사망했으며, 리보르노의 몬테네로 성소 산투아리오 델라 마돈나 디 몬테네로 교회 옆 로자에 안장되었다.
예술적 의의와 유산
파토리는 마키아이올리 그룹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마키아이올리는 19세기 후반 토스카나 지방에서 활동한 화가 집단으로,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나 사실주의를 지향했으며, 야외에서 직접 자연을 관찰하고 그림으로써 빛과 색채의 효과를 포착하는 데 주력했다. 이들의 방법과 목표는 프랑스 인상파와 유사하여 인상파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한다.
파토리의 작품 세계는 군사적 주제(전투 장면보다는 병영 생활, 군인들의 일상), 예민한 초상화, 풍경화, 시골 생활 장면, 말(馬) 그림 등으로 특징지어진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마젠타 전투의 이탈리아 진영》, 《팔미에리의 원형 테라스》, 《마렘마의 카우보이들》(Cowboys of the Maremma Driving the Herds, 1893) 등이 있다.
그의 작품은 로마 국립현대미술관(Galleria Nazionale d'Arte Moderna), 피렌체 피티 궁전의 현대미술관, 밀라노 브레라 미술관, 리보르노의 조반니 파토리 시립 미술관(Museo Civico Giovanni Fattori) 등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