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빈(趙觀彬, 1691년~1757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국보(國甫), 호는 회헌(悔軒 또는 晦軒),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생애
조관빈은 1691년(숙종 17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노론4대신 중 한 명으로 우의정을 지낸 조태채(趙泰采)이며, 어머니는 청송 심씨 부사 심익선(沈益善)의 딸이다. 좌의정 조사석의 종손자이며, 영의정 조태구와 좌의정 조태억의 조카이다.
1714년(숙종 40년)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715년부터 검열, 부수찬, 수찬, 부교리, 교리, 헌납,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719년 동부승지가 되면서 최연소 당상관으로 진출하였다. 경종 즉위 후인 1720년에는 대사간으로 승진하였고, 이후 대사성, 이조참의 등을 지냈다.
1721년 신임사화가 발생하자 아버지 조태채가 유배된 후 사사(賜死)되었고, 조관빈도 연좌되어 유배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후 노론이 재집권하면서 1725년 호조참의로 복귀하였고, 이후 강화유수, 대사성, 호조참판, 홍문관제학, 대사헌, 형조참판, 공조참판, 이조참판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집권하면서 다시 파직되었다가, 1729년 동지돈녕부사로 복직하였다. 1731년 대사헌으로 재직 중 신임사화의 전말을 상소하여 이광좌를 탄핵하였다가, 당론을 일삼고 사감으로 대신을 논척했다는 죄목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1732년 풀려난 후 한동안 등용되지 못하다가 1736년 도승지로 복귀하였다.
1740년 이후 호조참판, 홍문관제학을 거쳐 예조판서에 올라 정경(正卿)의 반열에 들었다. 이후 평안도관찰사, 한성부판윤, 대사헌, 지돈녕부사, 우참찬, 호조판서, 수어사(남한산성 담당) 등을 역임하였다. 1745년에는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749년에는 대제학(大提學)이 되었고, 이후 공조판서,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다. 1753년 대제학으로 재직 중 죽책문(竹冊文)의 제질(製述)을 거부하여 성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유배되었으나, 이후 풀려나 좌빈객과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757년 사망하였다.
성격 및 평가
철저한 노론 계열의 인물로, 아버지 조태채를 비롯한 노론4대신의 신원(伸寃)과 포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많은 글을 남겼으며, 저술로는 『회헌집(悔軒集)』 20권과 1747년 영조가 농부들의 수확 광경을 친히 보고자 거둥하였을 때 지어 바친 악장 2수가 수록된 『관예악장문(觀刈樂章文)』이 있다. 왕명으로 박문수, 김성응, 김상로 등과 함께 『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가족 관계
조관빈은 한진그룹(대한항공) 창업주인 조중훈(趙重勳)의 6대조이다. 여흥 민씨 집안(인현왕후 가문)의 민진원, 민진후 등과 인척 관계에 있다.
초상화
조관빈의 초상화 6점(1745년작, 1748년작, 1750년작 등)이 경기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22년 양주 조씨 문강공파 종손으로부터 기증받은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