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경부터 기원전 1046년까지 중국 황허(黃河) 유역을 중심으로 존속했던 고대 왕조로, 중국 조경·원림(園林) 문화의 기원 시기로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상나라 시기의 원림(園林)은 후대 중국 정원과 달리 관상적·미학적 목적보다는 실용적이고 상징적인 기능에 주안점을 둔 초기적 형태였다.
시대적 배경
상나라는 현존하는 기록상 중국 최초로 고고학적으로 실재가 확인된 왕조로서, 수도 은(殷, 현재의 허난성 안양 일대)을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이 시기의 갑골문자(甲骨文字) 기록과 후대 문헌 사료를 통해 상나라의 원림 조성 실태가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상나라의 토지 이용과 공간 조성 방식은 이후 주(周)나라를 거쳐 중국 전통 조경의 발전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상나라 원림의 형태와 기능
상나라 시기의 원림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인클로저형 사냥터였다. 상나라의 왕과 귀족들은 야생 동물이 서식하는 넓은 산림 지대를 일정 경계로 둘러싸 사냥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이러한 사냥터는 후대 중국 원림 개념의 직접적인 선구로 평가된다.
둘째, 경제적 생산 기능을 가진 원지(園地)였다.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는 농경 공간으로서, 왕실과 귀족의 식량 보급을 담당하는 실용적 성격을 지녔다.
갑골문자에는 정원(庭園)과 관련된 세 가지 한자가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囿)'는 왕실 전용 사냥터로서 새와 동물을 기르던 공간을, '포(圃)'는 식물을 재배하던 공간을 뜻하였다. '원(園/苑)'은 이 시기 재배 공간을 가리키는 글자로 출발하여 이후 진(秦)나라 시기에 이르러 모든 정원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확장되었다고 전한다.
대표적 원림 유적
문헌 기록에 따르면, 상나라 후기의 유명한 왕실 원림으로는 문왕(文王)이 도읍 은(殷)의 서쪽에 조성한 '영대(靈臺)·영소(靈沼)·영유(靈囿)'라고 불리는 정령의 공원이 전해진다. 이 정원은 『시경(詩經)』에 묘사되어 있는데, 사슴과 학 등의 동물이 서식하고 물고기가 노니는 연못을 갖춘 자연 친화적인 공간으로 기록되었다. 다만 『시경』의 이 구절이 문왕 시기의 실제 현황을 그대로 반영하는지, 후대 이상화된 서술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해석이 분분하다.
또한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은 '사구(沙丘)'라는 대규모 원유(苑囿)를 조성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기(史記)』 등 후대 문헌에 따르면 이곳에는 '주지육림(酒池肉林)'이라 불리는 연회 시설이 있었다고 기술되나, 해당 묘사는 후대의 문학적 과장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당시 실제 조성 규모와 양식에 대한 고고학적 확인은 제한적이다.
특징과 의의
상나라 시기의 원림은 관상과 유흥보다 사냥, 농업 생산, 그리고 왕권의 상징적 표상이라는 기능이 우선시되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왕실이 넓은 사냥터를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은 곧 왕권의 확장과 통제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치였다. 또한 자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원시적 공간 조성 방식은 이후 중국 원림이 추구하게 될 '자연과의 조화'라는 철학적 토대의 초기적 발현으로 이해될 수 있다.
후대에 미친 영향
상나라에서 시작된 원림 전통은 주나라의 문왕(文王) 시기에 크게 발전되었다. 주나라에서는 상나라의 유·포·원 개념을 계승·확장하여 영대(靈臺)·영유(靈囿)와 같은 대규모 원림을 조성하였다. 이후 진(秦)나라와 한(漢)나라를 거치면서 신선사상(神仙思想)이 결합되어 연못 위에 인공 섬을 만들고 봉래산(蓬萊山)을 상징적으로 조성하는 '일지삼산(一池三山)' 양식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장구한 발전 과정의 근원은 상나라의 원림 조성 전통에 있다는 점에서, 상나라는 중국 조경사에서 기원(起源)·형성기의 핵심 시대로 평가된다.
문헌 및 출처에 관한 참고 사항
본 서술은 상나라 원림에 관한 후대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자료에 근거한 것이다. 상나라 시기 원림 자체가 물리적으로 현존하는 유적은 확인되지 않으며, 당시 원림의 구체적 배치와 설계 원리는 문헌적 해석과 추정에 의존하는 측면이 있다. 따라서 세부적인 원림 조성 기법이나 정확한 규모에 관해서는 학술적 검증이 추가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