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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유대-로마 전쟁

제3차 유대-로마 전쟁(Third Jewish–Roman War)은 기원후 132년부터 136년까지 로마 제국의 유대 속주(Provincia Judaea)에서 발생한 유대인들의 마지막 대규모 반란으로, 바르 코크바 반란(Bar Kokhba Revolt) 또는 베타르 전쟁(War of Betar)으로도 불린다. 이 전쟁은 기원후 66년부터 135년까지 약 70년간 이어진 유대-로마 전쟁(Jewish–Roman Wars) 중 세 번째이자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배경

제1차 유대-로마 전쟁(66~73년)에서 예루살렘과 제2성전이 파괴된 이후에도 유대인들의 로마 지배에 대한 저항은 계속되었다. 기원후 130년경,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는 예루살렘을 유피테르 신에게 봉헌된 로마 식민지 아일리아 카피톨리나(Aelia Capitolina)로 재건할 계획을 세웠으며, 이는 유대인들의 성전 재건에 대한 희망을 완전히 꺾는 조치였다. 일부 학자들은 이 시기에 할례 금지 조치도 함께 시행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나, 이것이 반란 이전에 내려졌는지 이후의 처벌 조치였는지에 대해서는 학설이 나뉜다.

전쟁의 전개

반란은 시몬 바르 코크바(Simon bar Kokhba)가 지도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이스라엘의 나시(nasi, 영도자)'라 칭하였으며, 반란 세력은 독자적인 주화를 주조하고 행정 체계를 갖춘 독립 유대 국가를 수립하였다. 반란 초기에는 유대 속주의 총독 티네이우스 루푸스(Tineius Rufus)가 이끄는 로마 군대를 상대로 유대인들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하드리아누스는 로마의 가장 유능한 장군 중 한 명인 섹스투스 율리우스 세베루스(Sextus Julius Severus)를 파견하였고, 제국 각지에서 차출된 최소 9개 군단 병력(약 12만 명으로 추정)이 동원되었다. 세베루스는 정면 대결을 피하고 요새와 마을을 하나씩 점령하는 소모전 전략을 구사하였다. 반란군은 지하 은신처 복합 시설을 활용한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로마군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 점차 밀려났다.

결과

기원후 135년, 마지막 거점이었던 베타르(Betar) 요새가 함락되면서 반란은 진압되었다. 로마의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에 따르면, 유대인 58만 명이 전사하고 985개의 마을이 파괴되었으며, 유대 본토(Judea proper)는 거의 인구가 소멸되다시피 하였다. 생존자들은 대거 노예로 팔려갔고, 많은 이들이 강제 이주되었다.

반란 진압 후 하드리아누스는 유대 속주의 명칭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Syria Palaestina)로 변경하고, 예루살렘에는 유대인의 입주를 금지하였다. 이로써 유대인의 정치적 자주권은 완전히 상실되었으며, 유대교의 중심은 갈릴리(Galilee)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유대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더욱 심화시켰고, 랍비 유대교(Rabbinic Judaism)가 주류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명칭에 관한 참고사항

일부 역사학계에서는 제2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분류되는 키토스 전쟁(Kitos War, 116~118년)을 별도의 전쟁으로 보지 않는 경우도 있어, 바르 코크바 반란을 '제2차' 또는 '제3차' 유대-로마 전쟁으로 지칭하는 차이가 존재한다. 현대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제1차 유대-로마 전쟁(66~73년), 키토스 전쟁(116~118년), 바르 코크바 반란(132~136년)의 세 차례 주요 반란으로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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