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 이전, 그린란드는 덴마크의 식민지로서 외부 세계와 단절된 상태로 엄격히 통제되었다. 1940년 4월 9일, 나치 독일이 베저위붕 작전을 통해 덴마크를 침공하면서 그린란드의 상황은 급변하였다. 덴마크 본토가 점령되자 그린란드는 사실상 고립되었고, 영국 해군이 추축국 통제 하의 유럽에서 오는 모든 선박을 나포하면서 그린란드는 자체적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자치 선언과 미국의 보호
덴마크 점령 직후, 남그린란드와 북그린란드의 보안관(landsfogeder)인 에스케 브룬(Eske Brun)과 아크셀 스바네(Aksel Svane)는 1925년 제정된 그린란드 통치법의 비상 조항을 근거로 그린란드가 자치 지역임을 선포하였다. 이는 점령된 본국의 이익보다 식민지 자체의 최선을 위한 결정이었다. 이 조치는 주미 덴마크 대사 헨리크 카우프만(Henrik Kauffmann)과 미국 국무부의 조정 아래 이루어졌으며, 1920년 미국이 제3국의 그린란드 주권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과 맥락을 같이하였다. 이는 먼로 독트린의 연장선으로 간주되었다.
덴마크 정부는 여전히 존재했고 자체적으로 중립을 표방했으나, 독일의 외교 정책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카우프만 대사는 자국 정부가 완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독자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1941년 4월 9일, 독일의 덴마크 점령 1주년에 카우프만은 자국 정부의 지시에 반하여 코델 헐(Cordell Hull) 미국 국무장관과 그린란드 방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으로 미국은 그린란드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기지를 건설할 권리를 얻었으며, 그린란드는 사실상 미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전략적 중요성: 크라이올라이트와 기상 정보
그린란드의 전략적 가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했다. 첫째, 남서부 이비투트(Ivigtut)에 위치한 크라이올라이트 광산이었다. 크라이올라이트는 알루미늄 제련에 필수적인 융제로, 항공기 생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은 중립을 유지하면서도 이 광산을 보호하기 위해 해안경비대원 15명을 민간인 신분으로 고용하여 경비를 맡겼다.
둘째, 그린란드는 북대서양과 유럽의 기상 예보에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대기의 순환 패턴상 서쪽의 기상 관측이 동쪽의 기상 예측에 필수적이었기에, 그린란드의 기상 데이터는 군사 작전과 선단 항로 계획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로 인해 그린란드는 이른바 '북대서양 기상 전쟁(weather war)'의 주요 무대가 되었다.
미군 기지 건설과 그린란드 순찰대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은 그린란드에 광범위한 군사 시설을 구축하였다. 주요 기지로는 나르사르수아크(Narsarsuaq)의 블루이 웨스트 원(Bluie West One) 공군기지가 있었으며, 이곳은 대서양을 횡단하는 항공기들의 주요 급유 지점이 되었다. 수천 대의 연합군 항공기가 유럽으로 향하는 중간에 이 기지에 정차하였다. 또한 쇤드레 스트룀피오르(Søndre Strømfjord)의 블루이 웨스트 에이트(Bluie West 8) 등 다수의 비행장, 무선 기지, 기상 관측소, 항해 보조 시설이 건설되었다.
미국 해안경비대는 '그린란드 순찰대(Greenland Patrol)'를 창설하여 그린란드 해역을 순찰하고 연합군 선박을 호위하였다. 에드워드 H. 스미스(Edward H. Smith) 사령관이 지휘한 이 순찰대는 쇄빙선, 초계정, 수상 비행기 등을 운용하며 독일군의 활동을 감시하고 수색 구조 임무를 수행하였다.
시리우스 개썰매 순찰대(Sirius Dog Sled Patrol)
에스케 브룬 총독은 그린란드의 주권을 자체적으로 수호하기 위해 현지 사냥꾼과 안내인들로 구성된 엘리트 부대를 창설하였다. 이것이 시리우스 개썰매 순찰대(Slædepatruljen Sirius)였다. 15명의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이 부대는 이누이트 원주민, 덴마크 식민지 주민, 노르웨이 망명자들로 이루어졌으며, 그린란드 북동부 해안의 외딴 지역을 개썰매로 정찰하는 임무를 맡았다.
독일군의 기상 관측소와 교전
1942년 8월부터 독일은 그린란드 동해안에 4개의 비밀 기상 관측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1943년 3월 11일, 사빈 섬(Sabine Island)의 한자 만(Hansa Bay)에 설치된 독일 기상 관측소 '홀차우게(Holzauge)'가 개썰매 순찰대에 의해 발견되었다. 독일군은 발각 사실을 알고 순찰대를 추격했고, 순찰대는 장비와 개썰매를 버리고 후퇴해야 했다.
1943년 3월 23일, 독일군은 에스키모네스(Eskimonæs)의 순찰대 기지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이틀 후 불태웠다. 순찰대 대원들은 부상 없이 전투에서 살아남았으나, 썰매, 식량, 장비 없이 400마일(약 640km)을 걸어 엘라 섬(Ella Island)의 기지로 이동해야 했다. 3월 26일, 사빈 섬으로 귀환 중이던 독일군은 산도덴(Sandodden)에서 순찰대 병장 엘리 크누센(Eli Knudsen)을 매복 공격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는 전쟁 기간 동안 그린란드 개썰매 순찰대의 유일한 사망자였다.
미 육군 항공대는 아이슬란드에서 출격한 폭격기로 사빈 섬의 독일 기지를 폭격하였고, 해안경비대 상륙 부대가 이를 점령했으나 독일 인원 대부분은 도르니어 Do 26 수상 비행기로 이미 대피한 상태였다. 1944년 4월 22일, 순찰대 6명이 '바스가이거(Bassgeiger)' 기상 관측소를 공격하여 독일 중위 1명이 전사하였다.
마지막 독일 기상 관측소인 '에델바이스 II(Edelweiss II)'는 1944년 11월 4일 미군에 의해 점령되었고, 대원들은 포로로 잡혔다. 미군 쇄빙선 이스트윈드(USCGC Eastwind)에서 상륙한 병력이 이들을 생포하였으며, 보급 임무를 수행 중이던 독일 수송선 엑스테른슈타인(Externsteine)도 나포되어 미 해안경비대에 편입되었다. 이로써 1944년 10월까지 약 60명의 독일 기상 요원이 생포되면서 그린란드에서의 독일 기상 관측 활동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경제와 전후 영향
전쟁 기간 동안 그린란드는 미국, 캐나다, 포르투갈과 성공적으로 무역을 하였으며, 크라이올라이트 수출에 힘입어 경제가 재활성화되고 영구적인 재편이 이루어졌다. 1945년 5월 5일, 그린란드인들은 누크에서 덴마크 해방을 축하하였다. 에스케 브룬 아래의 그린란드 행정부는 비상 권한을 반납하고 다시 코펜하겐의 직접 통제 하에 들어갔다. 카우프만은 코펜하겐으로 돌아와 반역죄 혐의에서 면제되었고, 덴마크 의회는 그가 미국과 체결한 협정을 비준하였다. 미국의 주둔은 1951년 새로운 기지 조약으로 대체될 때까지 점차 축소되며 지속되었다. 전쟁 기간 동안의 독립적인 운영 경험은 그린란드에 대한 덴마크의 식민 정책에 극적인 재구조화와 현대화를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