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타운 학살(Jamestown Massacre)은 1622년 3월 22일 성 금요일에 버지니아 식민지 제임스타운 주변의 정착촌에서 발생한 무력 충돌 사건이다. 이 사건은 포우하탄 연방(Powhatan Confederacy) 소속 원주민 전사들이 당시 영국 정착민 인구의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347명을 살해한 기습 공격으로, 영국-포우하탄 관계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배경
1607년 건설된 제임스타운은 담배 농사의 성공으로 정착이 확대되었으나, 담배 경작이 토지를 급속히 황폐화시킴에 따라 정착민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땅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원주민의 영토를 침범하는 일이 빈번해졌고, 양측 간 갈등이 심화되었다. 1614년에는 포카혼타스(Pocahontas)와 영국인 존 롤프(John Rolfe)의 결혼으로 일시적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1618년 포우하탄 연방의 조정자 와훈세나카우(Wahunsenacawh)가 사망하고 동생 오페찬카노우(Opechancanough)가 지도권을 이어받으면서 상황이 변화하였다. 오페찬카노우는 정착민들의 지속적인 영토 잠식에 대응하여 조직적인 기습 공격을 계획하였다.
습격 경과
1622년 3월 22일, 포우하탄 전사들은 제임스 강을 따라 산재한 31개 정착촌과 농장을 동시에 기습 공격했다. 제임스타운 자체는 한 인디언 소년(또는 '차우코'라는 이름의 인물)이 리처드 패이스라는 정착민에게 계획을 사전에 알려 경보가 발령됨으로써 큰 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의 소규모 정착촌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헨리커스(Henricus) 정착촌이 파괴되었고, 마틴 핸드 레드 농장에서는 인구의 절반이 사망했으며, 월스텐홀름 타운은 두 채의 집과 교회 일부만 남았다. 20명의 여성 정착민이 포로로 잡혀갔다. 이 공격으로 농경지도 파괴되어 봄 수확이 불가능해지면서 일부 정착촌은 완전히 버려졌다.
영향과 보복
이 사건은 영국 본토에서 인디언에 대한 인식을 '야만인'이라는 이미지로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생존한 정착민들은 여름과 가을에 걸쳐 포우하탄족의 옥수수 밭을 습격하며 보복했다. 이후 평화 협상 자리가 마련되었으나, 이 자리에서 윌리엄 터커 대위와 존 포트 박사 등 정착민 측 인사들이 인디언들에게 독이 든 술을 제공하여 약 200명을 독살하고 추가로 50명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페찬카노우는 도주에 성공했다.
결과
1624년 버지니아는 영국 왕실령이 되었고, 정착민들의 영토 잠식은 계속되었다. 1644년 제2차 앵글로-포우하탄 전쟁이 발발하여 잉글랜드 측에서 약 5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나, 당시 정착민 인구 증가로 인해 1622년보다 상대적 피해는 작았다. 오페찬카노우는 체포되어 제임스타운에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정착민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사망은 포우하탄 연방의 몰락을 의미했으며, 포우하탄 족은 땅에서 쫓겨나 일부는 정착민에 동화되거나 유보지로 강제 이주당했다. 현대에는 포우하탄 연방에 속한 부족 중 7개만 남아 있으며, 보호구역은 파문키족과 맛타포니족 보호구역 두 곳만이 남아 있다.
한편, 이 사건으로 파괴되었던 헨리커스 정착촌과 대학의 후신으로 1693년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가 설립되었으며, 이는 하버드 대학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1698년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는 제임스타운에서 미들 플랜테이션(현재의 윌리엄스버그)으로 이전되었다.
'학살(Massacre)'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으나, 이는 일방적인 학살이라기보다는 정착민의 지속적인 영토 잠식과 평화 협정 파기에 대한 원주민의 무력 대응이라는 상호 충돌의 성격을 지닌 사건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