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챌리스(James Challis, 1803년 12월 12일 ~ 1882년 12월 3일)는 영국의 성직자이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이다. 잉글랜드 에식스 주 브레인트리(Braintree)에서 석공인 아버지 존 챌리스(John Challis)의 아들로 태어났다.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하여 1825년에 수석 레인글러(Senior Wrangler)이자 스미스 상(Smith's prize) 1위를 차지하였고, 1826년에는 트리니티 칼리지의 펠로로 선출되었으며 1830년에 성직 서품을 받았다.
1836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플루미안 천문학 및 실험 철학 교수(Plumian Professor of Astronomy and Experimental Philosophy)와 케임브리지 천문대(Cambridge Observatory) 대장을 역임하였다. 전임자 조지 비들 에어리(George Biddell Airy)의 뒤를 이어 천문대를 관리하며 관측 장비와 정확도를 점진적으로 개선하였고, 1846년 1월 15일에는 비엘라 혜성(3D/Biela)이 두 조각으로 분열된 것을 조기에 관측하였으며 1852년에 두 파편을 재관측하였다. 60편 이상의 과학 논문에서 혜성 및 소행성 관측 결과를 발표하였고, 1848년에는 메테오로스코프(meteoroscope), 1849년에는 통과-축약기(transit-reducer)를 발명하여 1851년 만국 박람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하였다. 12권의 《케임브리지 천문대 천문 관측록》(Astronomical Observations Made at the Observatory of Cambridge)을 출판하였다.
그러나 챌리스는 1846년 해왕성(Neptune) 발견의 기회를 놓친 것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존 코치 아담스(John Couch Adams)가 천왕성 궤도의 불규칙성을 바탕으로 미지의 행성 위치를 예측하였고, 에어리의 권유로 챌리스는 1846년 7월부터 관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후 관측 자료 정리 업무에 쫓겨 관측 결과를 즉시 분석하지 못하였고, 그 사이 프랑스의 위르뱅 르베리에(Urbain Le Verrier)가 독자적으로 동일한 예측을 하였으며 독일 천문학자 요한 고트프리트 갈레(Johann Gottfried Galle)가 1846년 9월 23일 해왕성을 최초로 확인하였다. 이후 챌리스의 관측 기록에는 그가 한 달 전인 8월에 이미 해왕성을 두 차례 관측하였으나 당시 성도(星圖)의 부족과 세심하지 못한 확인으로 발견하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다.
챌리스는 유체역학과 광학 분야에서도 연구를 수행하였으며, 빛의 파동 이론을 지지하고 발광 에테르(luminiferous ether) 매질 이론을 발전시켰다. 아이작 뉴턴의 원리를 바탕으로 탄성 유체 에테르 속에 구형 원자가 존재하는 모델로 모든 물리 현상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이 이론은 당대에 큰 지지를 얻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James Clerk Maxwell), 조지 가브리엘 스토크스(George Gabriel Stokes),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 켈빈 경) 등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의 학문적 성장에 관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1836년 왕립천문학회(Royal Astronomical Society) 회원, 1848년 왕립학회(Royal Society) 석학회원(FRS)으로 선출되었다. 달의 충돌구 중 하나가 그의 이름을 따 '챌리스(Challis)'로 명명되었다. 1882년 12월 3일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하였으며, 케임브리지 밀 로드 묘지(Mill Road Cemetery)에 아내와 함께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