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물포 조약(濟物浦條約)은 1882년 8월 30일(조선 고종 19년 음력 7월 17일) 임오군란의 사후 처리를 목적으로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다. 조일강화조약(朝日講和條約)이라고도 부른다. 조약의 명칭은 회담이 열린 장소인 제물포(현재의 인천광역시)에서 유래하였다.
배경
1882년 7월 23일(음력 6월 9일), 조선의 구식 군인들이 차별과 경제적 어려움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 공사관이 습격당하였고, 별기군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堀本禮造) 등 일본인 다수가 피해를 입었다.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는 일행과 함께 제물포를 거쳐 일본으로 탈출하였다.
일본 정부는 군함 4척, 수송선 3척, 보병 1개 대대 및 육전대 150명을 파견하여 무력 시위를 벌였고, 하나부사 공사는 이를 배경으로 조선 정부에 8개 조항의 요구안을 제시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유원(李裕元)을 전권대신, 김홍집(金弘集)을 전권부관으로 임명하여 제물포에서 회담을 진행하였고, 교섭 3일 만에 조약이 조인되었다.
주요 내용
제물포 조약은 본조약 6개조와 별도의 조일수호조규속약(修好條規續約) 2개조로 구성되어 있다.
본조약 6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관: 조선은 20일 이내에 흉도를 체포하여 수괴를 엄중 처벌한다. 일본이 파견한 인원이 공동으로 조사에 참여하며, 기한 내 체포하지 못할 경우 일본이 처리한다.
- 제2관: 피해를 입은 일본 관리와 직원은 조선이 후한 예로 장사 지낸다.
- 제3관: 조선은 5만 원을 피해자 유족 및 부상자에게 지급한다.
- 제4관: 일본이 입은 손해 및 공사 호위 군비 중 50만 원을 조선이 전보(塡補)한다. 매년 10만 원씩 5년에 걸쳐 완납한다.
- 제5관: 일본 공사관에 병사 약간을 두어 경비하게 한다. 병영의 설치와 수선은 조선이 부담한다. 조선의 병민이 규율을 지킨 지 1년 후 일본 공사가 경비가 필요하지 않다고 인정할 경우 철병할 수 있다.
- 제6관: 조선은 대관을 특파하여 국서를 보내 일본에 사죄한다.
조일수호조규속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제1관: 부산·원산·인천 각 항구의 일본인 통행 가능 거리를 사방 50리(조선리)로 확대하고, 2년 후 다시 각 100리로 확대한다. 1년 후 양화진(楊花津)을 개시장(開市場)으로 한다.
- 제2관: 일본 공사·영사 및 그 수행원과 가족의 조선 내지 여행을 허용한다.
영향과 의의
제물포 조약은 일본의 무력 시위 아래 강제로 체결된 불평등 조약으로 평가된다. 제1관은 조선의 사법 주권을 침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으며, 제5관에 따라 일본군 1개 대대가 한성(서울)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는 이미 청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던 상황에서 양국 군대의 충돌 가능성을 높이는 요인이 되었다.
조약 제6관에 따라 박영효,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이 일본에 파견되었고, 이들은 일본의 극진한 대접과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등의 영향으로 친일 성향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후 갑신정변(1884년)의 주도 세력이 되었다.
일본은 이후 동학 농민 운동(1894년) 당시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때 이 조약을 법적 근거로 활용하였다. 제물포 조약은 조선이 일본의 군사적·경제적 진출을 공식적으로 허용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조선의 국권이 점차 잠식되어 가는 과정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