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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셔먼호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 SS General Sherman)는 19세기 중반 조선 후기인 1866년에 조선의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양 군민에 의해 격침된 미국 상선이다. 선박의 이름은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의 장군이었던 윌리엄 테쿰세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선박의 개요

제너럴 셔먼호는 측면 외륜 방식의 증기 상선으로, 대포 2문을 갖추고 있었다. 이 배는 미국인 상인 프레스턴(W. B. Preston)이 소유하였으며, 당시 톈진(天津)에 기반을 둔 영국 메도즈 상사(Meadows & Company)와 용선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다. 승무원은 선장 페이지(Page), 1등 항해사 윌슨(Wilson), 선주 프레스턴, 영국인 화물 관리인 호가스(Hogarth), 영국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그리고 중국인 13명과 말레이시아인 3명 등 총 23~24명으로 구성되었다. 선원들은 전원 무장을 하고 있었다.

사건의 배경

1866년은 조선에 있어 대외 교섭이 긴장된 시기였다. 흥선대원군은 그해 초 천주교를 탄압하는 병인박해(丙寅迫害)를 단행하여 프랑스 신부들과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고, 이에 대한 프랑스의 보복이 예상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조선은 서양과의 통상을 국법으로 금지하고 있었다.

사건의 경과

제너럴셔먼호는 1866년 8월 9일 즈푸(Chefoo, 현재의 옌타이)를 출항하여 조선 해역으로 향했다. 조선 연해에 도착한 이 배는 통상을 요구했으나 조선 측은 서양과의 통상이 국법상 금지되어 있으며 불법 항해이므로 물러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제너럴셔먼호 측은 이를 무시하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8월 중순~8월 20일경 평양 경내에 진입하였다.

평양까지 도달한 제너럴셔먼호는 중국 상인 유화태의 인도 아래 비단, 유리그릇, 자명종 등의 화물을 쌀, 사금, 홍삼 등과 교역하자고 제의했으나 조선 측은 거절했다. 이후 제너럴셔먼호는 조선 관리들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만경대 부근까지 항행을 계속했다. 조선 측 중군 이현익(李玄益)을 붙잡아 감금하는 등 충돌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제너럴셔먼호 측이 대포와 소총을 발사하여 조선 군민 중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편 장맛비가 그치면서 대동강의 수위가 낮아져 제너럴셔먼호는 평양의 양각도(羊角島) 서쪽 모래톱에 좌초되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朴珪壽)의 지휘 아래 평양 관민은 9월 2일(음력 7월 27일) 화공 전술을 펼쳐 배에 불을 질러 결국 제너럴셔먼호를 소각·격침시켰다. 승무원 대부분이 사망하였으며, 통역으로 탑승했던 로버트 토마스와 중국 상인 조능봉 등 몇 명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강가로 나왔으나 분노한 평양 군민에 의해 사망하였다.

사건의 결과와 영향

이 사건은 조선과 미국 간의 최초의 무력 충돌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미국 정부는 1867년 슈펠트(Shufeldt)와 1868년 페비거(Febiger)의 탐문을 통해 사건 경위를 조사하였다. 미국 정부는 이 조사 결과와 강경한 포함(砲艦) 외교책에 따라 1871년 조선에 대한 군사 원정을 단행하였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이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신미양요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같은 해 발생한 병인양요와 함께 흥선대원군 정권의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대에 들어 북한은 1986년 대동강변에 셔먼호 격침비를 세우고 이 사건을 자국 역사에서 대미 항전의 사례로 기념하고 있으며, 김정일의 고조부인 김응우가 이 사건에 앞장섰다고 선전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이 사건을 일반적으로 '제너럴셔먼호 사건'으로 칭하며, 남북 양측 모두 구한말 서구 열강의 침략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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