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정희계

정희계(鄭熙啓, 1348년~1396년)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양성헌(養性軒), 시호는 양경(良景)이다. 아버지는 문하평리 월성군 정휘(鄭暉)이다.

생애

정희계는 고려 공민왕 때 용의(容儀)가 뛰어나 왕의 눈에 들어 근시(近侍)로 발탁되었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공민왕이 시해된 후에는 최영(崔瑩)의 휘하에 속하였다. 1383년(우왕 9) 밀직상의(密直商議)로 있을 때 남좌시 등과 함께 왜구와 싸웠으나 패배하였다. 이듬해 우왕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승진하였고, 이후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파견되었다.

1388년(우왕 14) 임견미·염흥방 일당이 숙청된 무진피화(戊辰被禍) 때 우왕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화를 면하였으나, 같은 해 6월 최영의 일파로 지목되어 음죽(陰竹)으로 유배되었다가 8월 창왕의 생일을 맞아 풀려났다. 이후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로 복직되었으나, 1390년(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옥사에 연루되어 안변(安邊)으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이후 이성계(李成桂)의 일파가 되어 1392년(공양왕 4) 판개성부사, 문하평리, 응양군상호군 등을 거쳐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개국에 동참하였다. 같은 해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록되고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팔위상장군(八衛上將軍)·계림군(雞林君)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판팔위사(判八衛事),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396년(태조 5) 등창으로 사망하였다. 사후 봉상시(奉常寺)에서 그의 시호를 안양(安煬)·안황(安荒)·안혹(安惑) 등으로 올리자, 태조 이성계는 이에 크게 노하여 악시를 올린 최견 등 5명을 장형에 처한 후 유배보냈고, 관련 관원들을 파직시켰다. 이후 시호는 양경(良景)으로 고쳐졌다.

가족 관계

정희계는 고려의 중신 염제신(廉悌臣)의 사위였으며, 염흥방(廉興邦)의 매부였다. 또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의 질녀와 혼인하여 이성계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아들로는 정길상(鄭吉祥)이 있으며,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에서 순절한 정발(鄭撥)의 5대조가 된다. 딸 중 한 명은 군기시판관 최도일(崔道一)에게 출가하였으며, 그 소생인 최씨는 조선 예종의 후궁(귀인최씨)이 되었다.

기타

개국 당시 '세 정씨(鄭氏)가 삼한(三韓)을 멸한다'는 도참설(圖讖說)이 널리 퍼져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 세 정씨가 정도전(鄭道傳)·정총(鄭摠)·정희계를 가리킨다고 믿었다고 한다. 정희계는 조선 개국 후 한성부(서울)의 수장인 판한성부사로 재임 중 순직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된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