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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중부

정중부(鄭仲夫, 1106년~1179년)는 고려 중기의 무신이자 정치인으로, 1170년 무신정변을 주동하여 고려 무신정권의 시대를 연 인물이다.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고려 후기 무신정권 초기의 정국을 주도했다.

생애와 무신정변 이전의 활동

정중부는 출신 가계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며, 해주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는 기록이 부족하다.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신장이 7척이 넘는 장대한 체격과 뛰어난 용모를 지닌 무인적 풍모를 갖추었으나, 욕심이 많고 인색하다는 평을 받았다. 처음에 주(州)의 군적에 올라 개경으로 보내져 공학군(控鶴軍)에 편입되었고, 인종 때 견룡대정(牽龍隊正)에 올랐다.

젊은 시절 인종이 참석한 나례(儺禮) 자리에서 문신 김돈중(金敦中)에게 촛불로 수염을 태우는 모욕을 당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는 무신과 문신 간의 대립이 노골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종과 의종을 곁에서 모시며 승진을 거듭해 의종 때 무신의 최고위 관직인 상장군에 올랐다.

무신정변의 주도

의종은 정사를 돌보지 않고 문신들과 연회와 향락에 빠졌으며, 그러한 자리에서 무신들은 경호만을 맡아 고초를 겪었다. 급료조차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하급 군인들의 불만이 쌓여가던 가운데, 1170년(의종 24) 8월 30일 정중부는 견룡행수산원 이고(李高)와 이의방(李義方) 등과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켰다. 국왕의 보현원(普賢院) 행차를 계기로 수행하던 문신과 환자들을 살해하고, 개경으로 진입하여 대소 문신 50여 명을 죽였다. 이들은 의종을 폐위하여 거제현으로 추방하고 태자를 진도현으로 유배 보낸 뒤, 의종의 아우 익양공 왕호를 명종으로 옹립하였다.

정변 직후 정중부는 문관직인 참지정사에 임명되고 이어 중서시랑평장사가 되었으며, 훈1등 벽상공신으로 책정되었다.

권력 장악 과정

정변 직후에는 정변을 가장 선두에서 주도한 이고, 이의방, 채원(蔡元) 등 젊은 장교들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권력투쟁 끝에 이고와 채원이 제거되고 이의방이 독자적인 권력을 쥐게 되었다. 정중부는 당시 권력투쟁의 화가 미칠 것을 우려하여 두문불출하고 있었으나, 원로 무신으로서 무신들 사이의 중심적 위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이 무신정권 타도와 의종 복위를 목표로 난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고, 정중부는 이의민을 시켜 경주로 옮겨진 의종을 살해하게 하였다. 1174년(명종 4)에는 조위총(趙位寵)이 서경에서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었으나 3년 만에 평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승려 종참을 이용해 이의방을 살해하였고, 이를 계기로 정중부가 명실상부한 무신정권의 1인자가 되었다.

집권기와 몰락

1174년 12월 정중부는 문하시중에 올랐으며, 이후 약 5년간 무신정권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집권 기간 동안 재물을 탐하여 남의 토지를 빼앗아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는 등 탐욕스러운 행태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아들 정균과 사위 송유인(宋有仁) 역시 권세를 믿고 횡포를 부렸으며, 이는 당시 무신과 관료들의 불만을 키웠다.

1178년(명종 8) 정중부는 시중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뒤를 이어 사위 송유인이 권력을 장악하였다. 1179년(명종 9) 정균이 자신의 권세를 믿고 공주에게 장가들려 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청년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거사를 일으켜 정균과 송유인 부자, 그리고 정중부를 모두 살해하였다.

정중부는 이고, 이의방 등 정변 주모자들을 차례로 제거하면서 무신정권 초기의 정국을 주도했으며, 이후 약 100년간 이어진 고려 무신집권기의 서막을 연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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