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순(鄭尙淳, 1723~1786) 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돈부(敦夫) 또는 돈보(敦夫)이다. 증조부는 정재대(鄭載岱)이고, 조부는 정욱선(鄭勗先)이며, 부친은 정석행(鄭錫行)이다. 모친은 이징해(李徵海)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한림이 되었고, 정언·부교리·지평·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755년 홍문관에 근무하면서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에 대한 구제 조치를 주청하였다. 1756년에는 경기어사로 파견되어 탐관오리를 적발하고, 같은 해 영남암행어사로도 파견되어 각 지역 수령들의 공과를 보고하였다. 이후 교리·부응교를 거쳐 안음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가 승지·이조참의로 당상관에 올랐다.
1763년 통신사(通信使)에 임명되었으나 노모 봉양을 이유로 사양하다가 김해로 유배되었다. 1765년 이조참의를 지내고, 이듬해 대사성·부제학·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768년 강화유수로 재직하면서 군량미 부족 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을 요청하였다. 이후 도승지·대사헌·동의금·동경연 등을 지냈다.
1776년 정조 즉위 후 빈전도감(殯殿都監) 제조로 활동하였고, 예조판서를 지내며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같은 해 악기도감 제조로서 경모궁(景慕宮)에 악기를 설치하는 데 기여하였다. 1777년 청나라 황태후가 사망하자 진위겸진향정사(陳慰兼進香正使)로 청나라에 파견되었고, 귀국 후 판윤으로 활동하였다. 1778년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유명무실한 내시교관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였다. 1779년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였다.
1780년 평안도관찰사로 외직에서 선정을 베풀었고, 이후 호조판서·예조판서·좌참찬·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예조판서 시절에는 외읍에서 거행하는 포제(酺祭)의 격식을 통일하는 데 기여하였다. 1784년 수어사·이조판서·공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광주(廣州) 결전(結錢)의 규정 확립을 주장하고 조군(漕軍)의 기만 행위와 지방관의 관리 소홀을 철저히 다스리고자 하였다. 1785년 판윤에 임명되었으며, 1786년 생을 마쳤다.
한편, 동명이인으로 정상순(1966~1991) 열사가 있다. 1966년 11월 1일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에서 정해남과 오진기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순천공업고등학교 토목과를 졸업하고 광양제철에서 측량기사로 근무하였으며, 군 제대 후 건설 노동자와 택시사업에 종사하면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였다. 1991년 5월 22일 전남대학교 병원 영안실 옥상에서 "노태우 물러가라"는 구호와 함께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하였으며, 7일 후인 5월 29일 운명하였다. 장례는 〈애국청년 고 정상순열사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2001년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