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 정서)
정(情)은 '사물이나 대상에 느끼어 일어나는 마음'을 뜻하는 말이다. 사전적으로는 '사랑이나 친근감을 느끼는 마음'으로 정의되기도 하나,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기본적인 의미를 넘어서는 독자적이고 깊은 문화적 함의를 지닌 개념으로 사용된다. 특히 한국의 대표적인 정서(情緖)로 곧잘 언급된다.
어원 및 한자적 의미
정은 한자 '情'에서 비롯된 글자로, 그 자체로 '마음(忄)이 청춘(青)의 생기와 결합된'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의 유학 전통에서는 정을 인간의 심성(心性) 구조 속에서 중요한 요소로 다루어 왔다. 유학적 관점에서 정은 '발하지 않으면 성(性)이라 하고 발하면 정(情)이라 한다'는 표현에서 보듯, 인간 내면에 내재한 본성(性)이 외부 사물에 접촉하여 구체적으로 드러난 작용으로 이해되었다.
유학에서의 정
한국 유학의 주요 학자들은 정에 관해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인심도심도설(人心道心圖說)」에서 정을 '심(心)이 사물에 응해서 밖으로 발하는 것' 또는 '심의 용(用)'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는 정을 도의(道義)를 위해 발하는 것과 입이나 몸을 위해 발하는 것의 둘로 구분하였다.
-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심통성정도설(心統性情圖說)」에서 '성이 발현하는 것이 정'이라고 보았으며, 정이 방탕에 흐르기 쉬우므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정을 절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정이 성에서 발하되 마음이 주재(主宰)하지 못하면 인욕(人欲)에 흘러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칠정(七情) 가운데 희·락·애·욕을 좋은 것으로, 노·애·오를 궂은 것으로 구분하는 '칠포사(七包四)' 논을 주장하였다.
유학에서의 정은 일반적으로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欲)의 일곱 가지로 묶인 인간 감정, 즉 칠정(七情)으로 정리된다.
한국 사회에서의 정
한국인은 한자 '정'을 철저히 토착화하여 일상생활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해 왔다. '정답다', '정겹다', '정들다', '정떨어지다', '정차다', '정을 두다', '정붙다', '정떼다', '정을 주다', '정을 받다' 등 다수의 고유어적 표현과 관용구가 형성되었다. '정나미'와 같은 파생명사까지 존재한다.
한국에서 정은 단순한 감정을 넘어 다음과 같은 다층적 의미를 지닌다.
- 인간관계의 유대: 정은 가족, 친족, 이웃, 친구 등 인간관계를 엮는 내적인 끈으로 작용한다. 혈연의 정, 인정(人情), 향정(鄕情) 등의 표현에서 그 사회적 기능이 드러난다.
- 사물과의 관계: 사정(事情), 물정(物情) 등의 표현에서 보듯, 정은 인간 환경과 그 속의 사물, 자연과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 미적 체험: 서정(抒情), 시정(詩情) 등에서 보듯, 정은 자연을 대상으로 한 시적·심미적 체험의 내용이 되기도 한다.
정은 '따뜻한 손길', '훈훈한 입김', '아랫목', '화로', '모닥불', '따뜻한 국이나 찌개' 등의 이미지로 상징되어 왔다. 한국인은 정을 마음의 훈기이자 밝음으로 인식해 왔다.
문화적 특수성
정은 서구의 '감정(affekt)'이나 '파토스(pathos)' 개념과 그 내포와 외연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서구의 사랑(love)이 개인주의적이고 선택적이라면, 한국의 정은 공동체적이고 시간의 축적을 통해 형성되는 관계적 정서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은 공유된 경험, 상호 지지, 무언의 이해를 통해 형성되는 유대감으로, 사랑이나 우정, 친근감 등 단일한 서구 개념으로는 온전히 번역되기 어렵다고 평가된다.
한국은 종종 '정의 사회'라고 자칭되기도 하는데, 이는 정이 한국 사회의 인간관계와 공동체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음을 반영한다.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에서는 품앗이, 두레, 계, 향약 등이 정의 유대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제도적 장치로 기능하였다.
현대적 논의
한국 사회의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정이 쇠퇴하였다는 논의가 있어 왔다. 혈연과 지연 중심의 전통적 공동체가 해체되면서 정이 메말랐다는 진단과, 동시에 도시 사회에서도 정이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될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정은 학술적으로도 한국인의 의사소통 방식, 자기표현, 문화적 정체성 연구의 주요한 분석 대상이 되고 있다.
참고 자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 항목
- 위키백과, '정(정서)' 항목
- 김장이(2014), 「한국인의 의사소통과 자기표현에 대한 연구」,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 선병일(2018), 「한국적 정서로 표현된 '정(情)'과 '효(孝)'의 디자인 연구」, 『상품문화디자인학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