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고씨(長興高氏)는 전라남도 장흥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중연(高仲筵, 一名 福林)으로, 제주 고씨의 중시조인 고말로(高末老)의 10세손이다.
역사
고중연은 고려 말기인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의 제2차 침입 당시 공민왕을 호종하여 경상북도 안동(복주)으로 피난하였다. 이 공로로 호종공신(扈從功臣)에 책봉되고 장흥백(長興伯)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장흥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시조의 아들 고합(高合)은 지영주사(知寧州事)를 지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3세 고백안(高伯顔)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전라도 영광(현 장성군 삼계면 지역)으로 이거하였고, 이후 4세 고협(高協), 5세 고열(高悅)까지 은거하며 출사하지 않았다. 6세 고상지(高尙志) 대에 이르러 조선조에 처음 출사하였으며, 7세 고자검(高自儉)이 광주 압촌마을(현 광주광역시 남구 압촌동)로 이거하면서 가문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인물
장흥 고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이 있다. 고경명은 1558년(명종 13) 식년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의 나이로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의병 6천을 일으켜 금산 전투에서 순국하였다. 큰아들 고종후(高從厚)는 복수의병장이 되어 진주성 전투에 참가하였고, 성이 함락되자 김천일, 최경회와 함께 남강에 투신 자결하여 '진주 3장사'로 불린다. 선조는 고경명에게 충렬(忠烈), 고종후에게 효열(孝烈), 고인후에게 의열(毅烈)의 시호를 내렸다.
고경명의 아들로는 고종후, 고인후, 고준후, 고순후, 고유후, 고용후 등 6형제가 있었다. 고인후의 후손 중 일부가 처가가 있는 담양군 창평면으로 이거하여 '창평 고씨'로도 불린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28명을 배출하였으며, 고운(高雲), 고맹영(高孟英), 고부천(高傅川)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분파
장흥 고씨는 제주 고씨의 장흥백파(長興伯派)에 해당하며, 고경명의 아들들을 파조로 하는 여러 분파가 있다. 장흥 고씨는 장택 고씨(長澤高氏)로도 불리며, 창평 고씨(昌平高氏) 역시 동일 계열이다.
인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장흥 고씨는 75,517명, 장택 고씨는 38,539명으로 총 114,056명이다. 주요 집성촌은 광주광역시 남구 대촌동 압촌리, 지석리, 이장동 일대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장성군 삼계면, 전라북도 부안군 등지에 분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