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충단비(奬忠壇碑)는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에 위치한, 대한제국 시대에 제작된 석비이다. 1969년 9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 수량은 석비 1기와 토지 1㎡이다.
역사적 배경
장충단비는 1895년(고종 32년)에 발생한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일본인에 맞서 싸우다 순사한 시위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한 여러 장졸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제단인 장충단(奬忠壇)에 함께 세워졌다. 장충단이 건립된 곳은 원래 조선 영조 때 서울 도성 남쪽을 수비하던 군영인 남소영(南小營)이 있었던 터이다.
고종은 1900년(광무 4년) 9월 이곳에 제단을 꾸미고 장충단이라 명명하였으며, 같은 해 11월에 장충단비를 함께 세웠다. 이후 1901년에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충신들도 추가로 모셨다.
형태와 구성
비는 반듯한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간결한 구조이다. 앞면에는 '장충단(奬忠壇)'이라는 비의 명칭이 전서체(篆書)로 새겨져 있는데, 이 글씨는 이후 순종 황제가 된 황태자가 쓴 친필(예필, 睿筆)이다. 뒷면에는 당시 육군부장(陸軍副將)을 지내던 민영환(閔泳煥, 충정공)이 짓고 쓴 찬문(撰文)이 새겨져 있으며, 비문의 내용은 을미사변 당시 순국한 이들의 충성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변천 과정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장충단비를 뽑아버렸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이라 명명하고 벚꽃을 심고 각종 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상하이사변 당시 일본군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 히로부미의 혼을 달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세우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 일제가 세웠던 건물들이 철거되고 비석도 다시 찾아져 영빈관(현 신라호텔 자리) 안에 세워졌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장충단의 사당과 부속건물이 파괴되어 장충단비만 남게 되었다. 1969년 현재의 위치인 수표교(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쪽으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문화유산적 가치
장충단비는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적 사건인 을미사변과 당시 순국한 인물들을 기념하는 유물로, 순종 황태자의 친필과 충정공 민영환이 찬한 비문이 새겨져 있어 역사적·서예적 가치가 높다. 장충단에서 제례를 지낼 때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을 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광경이 민요로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현재 장충단이 위치한 일대는 장충단공원으로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