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만영(張萬榮, 1914년 1월 25일 ~ 1975년 10월 8일)은 대한민국의 시인이자 번역문학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호는 초애(草涯)이다. 일제강점기 황해도 연백에서 출생하여 배천 지역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후 일본 도쿄의 미자키(三岐) 영어학교에 진학했으나, 1936년 부모의 권유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장만영은 1931년 잡지 『동광(東光)』의 독자투고란에 습작을 싣기 시작했으며, 1932년 5월호에 시 「봄노래」가 김억(金億)의 추천을 받으면서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하였다. 이후 『조선일보』, 『동광』, 『신동아』 등에 시를 꾸준히 발표하였다.
그의 첫 시집 『양(羊)』은 1937년에 자가판(自家版)으로 100부 한정 출간되었다. 이후 『축제(祝祭)』(1938), 『유년송(幼年頌)』(1948), 『밤의 서정』(1956), 『저녁종소리』(1957), 『장만영선시집』(1964), 『등불따라 놀따라』(1970), 『저녁놀 스러지듯이』(1973) 등 총 8권의 시집을 간행하였다.
장만영은 도시적·문명적 감각보다는 전원적이고 서정적인 제재를 현대적 감성으로 노래한 이미지스트 경향의 시인으로 평가된다. 농촌의 감수성을 바탕으로 동심과 서정을 담아낸 점에서는 신석정과, 대상을 선명한 이미지로 형상화한 점에서는 김광균 등 모더니스트들과 맥을 같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론가 최재서는 그의 시를 "이미지와 운동이 합쳐서 세련된 위트의 시"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생애 활동을 보면, 1944년 아버지가 경영하던 황해도 배천의 온천 사업을 맡았고, 1948년 서울에서 출판사 산호장(珊瑚莊)을 경영하며 김기림 등 문우들의 시집을 발행하였다. 1950년 6·25 전쟁 시기에는 종군작가단에 참여하여 『전선문학』 간행에 관여하였다. 1954년에는 서울신문사에 입사하여 출판국장을 역임하며 잡지 『신천지』와 학생문예지 『신문예』를 주간하였다. 1959년 한국시인협회 부회장, 1966년 회장에 선임되었고, 1968년 신시 60년 기념사업회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1968년에는 인하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를 지냈다.
저서로는 시집 외에도 자작시 해설집 『이정표』(1958), 수필집 『그리운 날에』(1965), 번역시집 『남구(南歐)의 시집』(1956), 『바이론시집』(1961), 『하이네시집』(1961) 등이 있으며, 『고등문예독본』(1952), 『현대시의 이해와 감상』(1957), 『소월시 감상』(1957) 등의 저술도 남겼다.
장만영은 1973년 급성췌장염으로 인한 합병증이 발병하여 약 2년간 투병하다가 1975년 10월 8일 향년 61세로 사망하였다. 1983년 경기도 용인의 공원묘지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다.
그의 시 「향수」는 바닷가에 앉아 삶의 고단함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작품으로, 한국 현대시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교육 과정에서도 자주 다루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