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자수궁(慈壽宮)은 조선시대 서울 옥인동(현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일대)에 위치했던 궁가(宮家)이다. 한자 뜻은 '자비로운 장수(長壽)의 궁'이다. 조선 왕조 공식 기록인 《조선왕조실록》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여러 공신력 있는 사료에 등장하는 실제 존재했던 건축물이다.
연원
자수궁의 부지(垈地)는 원래 조선 태조의 일곱째 아들인 무안대군(撫安大君) 이방번(李芳蕃, 1381~1398)이 살던 집이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이 이 집을 수리하여 아버지 세종(世宗)이 승하한 후 남은 후궁들이 함께 거처할 수 있도록 마련해 주면서 자수궁이 설립되었다. 당시 세종에게는 8명의 후궁이 있었는데, 그중 왕자를 낳은 신빈김씨(愼嬪金氏)와 혜빈양씨(惠嬪楊氏)는 각각 신빈궁과 혜빈궁을 따로 하사받았고, 나머지 옹주만 낳았거나 자녀가 없었던 후궁들은 자수궁으로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위치
자수궁은 경복궁 서편에 위치했다. 1472년(성종 3년) 예조의 계사(啓辭)에 "자수궁 동쪽 냇물이 경복궁 영추문(迎秋門) 수구(水口)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언급한 기록을 통해 이 위치가 확인된다. 현재의 지번으로는 서울 종로구 옥인동 45-1번지 일대, 필운대로 68 부근으로 비정된다.
역사
자수궁은 단순히 세종 후궁들만의 거처가 아니라 이후 여러 왕대에 걸쳐 후궁들의 공동 거처로 사용되었다.
- 성종 대에는 폐비 윤씨(폐비 윤씨, 연산군의 모후)가 이곳에 유폐되었고, 세조(世祖)와 예종(睿宗)의 후궁들도 함께 거처하였다. 세조의 후궁 근빈박씨(謹嬪朴氏)는 별도로 창수궁(昌壽宮)을 하사받았다.
- 연산군 대(1504년)에는 성종의 후궁들은 수성궁(壽城宮)으로 옮기고, 문종의 후궁들을 자수궁으로 다시 들이는 등 여러 차례 거주자의 변동이 있었다.
- 명종 대에는 인종(仁宗)의 후궁이 거처했다.
- 1493년(성종 24년)에는 터가 습하고 협소하여 이전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 않았다.
- 광해군 대(1616년)에는 인왕산의 왕기(王氣)를 누르기 위해 이곳에 별도의 궁궐을 지었다는 기록이 위키백과 등에 전해지며, 인조반정 후 자수원(慈壽院)으로 개칭되어 비구니 사찰(尼院)이 되었다.
- 1765년(영조 41년) 자수궁 건물을 헐어 그 목재로 성균관(成均館)의 비천당(丕闡堂)을 세웠다.
현황
현재 서울 종로구 옥인동 일대에 '자수궁터(慈壽宮址)' 표석이 설치되어 있으며, 주변에 화계 석축(花階石築) 일부 흔적이 남아 있다. 자수궁교(慈壽宮橋)라는 돌다리가 백운동천(白雲洞川)에 놓여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암거(暗渠) 공사로 소멸하였다.
의의
자수궁은 조선시대 왕실 여성(특히 후궁)들의 승하 후 거처와 처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세종에서 영조까지 약 300년 이상 존속하며 후궁의 공동 주거 공간, 폐비의 유폐 장소, 그리고 후기에는 원찰(願刹)로 기능이 변화한 점 등 조선 왕실사의 다양한 측면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