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당(日本社会党, Nihon Shakai-tō)은 일본 메이지 시대 후기에 존재했던 사회주의 정당이다. 1906년 2월 24일 결성되었으며, 일본 역사상 최초의 합법적 사회주의 정당으로 기록된다.
배경과 창당 과정
1900년의 치안경찰법(治安警察法) 제정 이후 일본의 사회주의 운동은 사회민주당(1901년)이나 평민사(1903년) 등의 시도에서 보듯 정부의 엄격한 감시와 탄압 아래 있었다. 1904~1905년의 러일전쟁 시기 사회주의 반전 운동의 중심지였던 『평민신문』(平民新聞)도 전쟁 종결과 함께 탄압되었으며, 핵심 인사들인 고토쿠 슈스이(幸徳秋水) 등은 투옥되기도 했다.
그러나 1906년 1월 가쓰라 다로(桂太郎) 내각에 이어 더 온건한 성향의 사이온지 긴모치(西園寺公望) 내각이 출범하면서 사회주의 정당 설립의 여지가 열렸다. 1906년 2월, 니시카와 고지로(西川光二郎) 등이 주도한 '일본평민당'의 창당이 인정받은 데 이어, 사카이 도시히코(堺利彦) 등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도 당 창설을 신청했다. 두 세력은 1906년 2월 24일 도쿄 교바시구(京橋区, 현 주오구)의 평민병원에서 제1회 당대회를 열고 합병하여 일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창당대회 참가자는 35명이었고 당원은 200명 미만이었으며, 근대적 공장 노동자는 거의 포함되지 않았다.
강령과 활동
일본사회당은 사회민주당과 평민사의 의회주의 노선을 계승하여 당규 제1조에 "본당은 국법의 범위 내에서 사회주의를 주장한다"고 명시하였다. 기관지로는 창당 전부터 존재하던 『빛』(光)과 『평민신문』, 그리고 고토쿠 슈스이가 1907년 1월 창간한 『일간평민신문』이 있었다.
창당 직후부터 도쿄 시영 전차 요금 인상 반대 운동, 보통선거 운동, 아시오(足尾) 동산 쟁의 지원 등 적극적인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당내 대립과 해산
1906년 6월 미국에서 귀국한 고토쿠 슈스이는 미국에서의 아나르코생디칼리슴 영향 아래 의회정치의 유용성을 부정하고, 총파업에 의한 '직접행동론'을 당내에 제기하였다. 이에 맞서 가타야마 센(片山潜)과 다조에 데쓰지(田添鉄二) 등은 노동자 보통선거를 통한 '의회정책론'을 주장하여 양파가 대립하였다.
1907년 2월 제2차 당대회에서 직접행동파와 의회정책파 간의 충돌이 표면화되었다. 의회정책론을 명시하는 수정안은 2표에 그친 반면, 의회 참여의 무용성을 주장하는 직접행동 수정안이 22표를 얻어 큰 지지를 받았으나 과반에는 미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집행부의 절충안이 채택되었지만, 당의 공식 강령은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변화하였으며 당규 제1조도 "사회주의의 실행을 목적으로 한다"로 개정되었다.
이러한 급진화 경향을 우려한 사이온지 내각은 1907년 2월 22일, 당의 노선이 "공공의 평화와 질서에 해롭다"는 이유로 치안경찰법을 적용하여 일본사회당의 결사(結社)를 금지하고 해산을 명령하였다. 당의 기관지였던 『일간평민신문』도 법적 압박으로 같은 해 4월 폐간되었다.
역사적 의의
일본사회당은 창당부터 해산까지 약 1년도 채 존재하지 못했지만, 일본 최초이자 이후 10년간 유일한 합법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당내에서 벌어진 사회민주주의와 아나르코생디칼리슴 간의 대립은 당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내부의 이념 갈등을 반영하였다. 당의 해산은 러일전쟁 이후 잠시 열렸던 정치적 자유화의 종말을 의미했으며, 1920년대까지 이어진 일본 좌익 운동계의 '겨울 시대'(冬の時代)로 접어드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1906년 일본사회당의 명칭은 1945년 창당된 전후(戰後)의 일본사회당과 구별하기 위해 "일본사회당(1906년)"으로 통칭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