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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라켄 수도원

인터라켄 수도원(독일어: Kloster Interlaken, 또는 독일어: Augustinerchorherrenstift)은 스위스 베른주 인터라켄에 있었던 아우구스티누스 정규 수도회(Augustinerchorherren) 소속의 수도원이다. 약 1133년에 설립되어 1528년까지 운영되었으며, 현재는 스위스 국가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수도원의 설립은 오버호펜(Overhofen) 성의 공동 소유주였던 셀리거 남작(Baron Seliger of Oberhofen)에 의해 이루어졌다. 1133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로타르 3세가 이 수도원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두면서 수도원장이 처음으로 문헌에 언급되었다. 수도원은 로잔 교구에 속해 있었으며, 1133년의 기록에 따르면 수도원 구성원들은 수도원장을 선출하고 종교 시설의 관리인(kastvogt)도 직접 선택할 수 있었다. 12세기 동안 수도원장은 교황과 주교의 인준을 모두 받았다.

1247년경부터는 수도원에 수녀들도 함께 거주하게 되어 남녀 공동 수도원의 형태를 갖추었다. 12세기 동안 관리인 직위는 에센바흐(Eschenbach) 가문이 맡았으나, 1308년 발터 폰 에센바흐가 요한 파리치다의 로마왕 알브레히트 1세 암살을 도운 사건으로 인해 1318년 가문은 관리인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후 알브레히트의 아들인 오스트리아 군주 레오폴트 1세가 관리인으로 선정되었고, 그의 사후에는 그의 형제 알베르트 2세에게 직위가 이전되었다. 그럼에도 수도원은 계속해서 자체적으로 수도원장과 관리인을 선출할 수 있었다. 15세기 들어 베른이 수도원의 후원자가 되고자 시도했으나, 1472년에 가서야 실현되었다.

13세기 동안 수도원의 영향력은 인근 지역과 아레 계곡, 귀르베 계곡으로 확대되었다. 수도원은 24개 이상의 교회에 대한 권위를 가지게 되었고, 여러 마을과 농장을 거느리며 이 지역 최대의 토지 소유 종교 기관이 되었다. 영지는 특히 툰 호수 동쪽 끝, 브리엔츠 호수 주변, 라우터브루넨 계곡과 그린델발트 계곡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었다. 13세기와 14세기 초반은 수도원이 성장하고 번영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1350년경부터 위기와 갈등이 시작되면서 승려와 수녀의 수가 감소하고 부채가 증가하였다. 1310년의 문서에는 수도원에 30명의 사제, 20명의 평신도 형제, 350명의 수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1472년에는 수도원장, 부원장, 9명의 정규 수도사, 7명의 수련자, 27명의 수녀만이 남아 있었으며, 소작인 및 인근 주민들과의 분쟁도 겪고 있었다.

1348년에는 그린델발트와 빌더스빌 주민들이 운터발덴과 상호 방위 동맹을 결성하였고, 이에 베른이 베르너 오버란트에 대한 군사 원정으로 대응하면서 운터발덴과 그 동맹 세력은 패배하였다. 1445년에는 인터라켄 부근의 오버란트 지역에서 베른의 병역과 세금에 반대하는 사악 동맹(Böser Bund)이 결성되어 봉기하였으며, 이는 옛 취리히 전쟁으로 이어졌다.

14세기가 되면서 수도사와 수녀들은 대부분의 수도원 규율을 준수하지 않게 되었다. 1472년에는 수도사와 수녀 사이에 폭력적인 분쟁이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로잔의 주교가 두 차례 방문하여 심각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수도원장은 체포되었고, 일부 사제는 다른 수도원의 수도사로 교체되었다. 개혁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녀원은 1484년에 폐쇄되었으며, 그 재산은 새로 설립된 베른의 성 빈센트 수도원으로 이관되었다.

종교 개혁의 영향으로 1528년 인터라켄 수도원은 폐쇄되고 세속화되었다. 수도사들은 재정적 보상을 받았으며, 수도원의 재산은 베른의 행정관이 관리하게 되었다. 모든 부채 이자의 탕감을 기대했던 수도원의 세입자들은 폭동으로 대응했으나, 베른이 이를 진압하였다.

종교 개혁 이후 베른 정부는 수도원 토지를 기반으로 인터라켄 행정 관청을 설치하였다. 수도원 건물의 일부는 관공서로 사용되었고, 나머지 건물은 빈곤자를 위한 병원으로 활용되었다. 1562~1563년에는 수도원 교회의 성가대석이 곡물 창고와 포도주 판매장으로 개조되었다. 1746년부터 1750년 사이에는 당시 주지사였던 사무엘 티리어(Samuel Tillier)에 의해 수도원의 서쪽 건물이 철거되고 '뉴캐슬'이라고 불리는 신축 건물이 세워졌으며, 이후 이 건물은 인터라켄 지방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인터라켄 성에는 수도원 건축의 일부가 통합되어 있으며, 고딕 양식의 회랑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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