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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독립 전쟁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인도네시아어: Revolusi Nasional Indonesia, 영어: Indonesian National Revolution / Indonesian War of Independence)은 1945년 8월 17일부터 1949년 12월 27일까지 인도네시아 공화국과 네덜란드 제국 사이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 및 외교 투쟁이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인도네시아 국민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배경

인도네시아의 독립 운동은 20세기 초부터 시작되었다. 1908년 부디 우토모(Budi Utomo)의 설립은 민족 각성의 시발점으로 평가된다. 이후 인도네시아 국민당(PNI), 사레카트 이슬람(Sarekat Islam), 인도네시아 공산당(PKI) 등 여러 민족주의 단체가 성장하였다. 수카르노(Soekarno)와 모하마드 하타(Mohammad Hatta)는 네덜란드 윤리 정책의 교육 개혁 혜택을 받은 대표적인 민족주의 지도자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이 1942년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점령하면서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는 중단되었다. 일본은 점령 기간 동안 민족주의 정서를 장려하고, 향토방위의용군(PETA) 등 인도네시아인으로 구성된 군사 조직을 창설하였다. 1944년 9월 7일, 일본 고이소 총리는 인도네시아 독립을 약속하였다.

독립 선언과 전쟁의 발발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후, 이틀 뒤인 8월 17일 수카르노와 하타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다음 날 인도네시아 독립 준비 위원회(PPKI)는 수카르노를 대통령, 하타를 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고 재식민지화를 시도하였다. 전쟁 직후 네덜란드는 본토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으나, 미국의 경제 원조를 바탕으로 약 12만~18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인도네시아 재점령에 나섰다.

주요 전투 및 경과

1945년 10월~11월, 동자바 수라바야(Surabaya)에서 영국군과 인도네시아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인도네시아 측은 약 6,000~16,00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11월 10일은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영웅의 날'(Hari Pahlawan)로 지정되었다.

1946년 3월, 반둥(Bandung)에서 인도네시아군은 영국군의 퇴거 요구에 응해 도시 남부를 고의로 방화하여 초토화시켰는데, 이는 '반둥 불바다'(Bandung Lautan Api)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1946년 11월, 영국의 중재로 링가르자티 협정(Linggadjati Agreement)이 체결되어 네덜란드는 자바, 마두라, 수마트라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사실상의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러나 양측의 불신으로 협정은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1947년 7월 21일, 네덜란드는 '생산 작전'(Operatie Product)이라는 이름의 1차 군사 공세(네덜란드 측은 '경찰 행동'이라 칭함)를 개시하여 자바와 수마트라의 주요 경제 거점을 장악하였다. 국제 사회의 압력으로 휴전이 이루어졌고, 1948년 1월 USS 렌빌(Renville) 선상에서 렌빌 협정이 체결되었다.

1948년 9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마디운(Madiun)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수카르노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사건은 미국이 수카르노의 반공 의지를 확인하고 인도네시아 독립을 외교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1948년 12월 19일, 네덜란드는 '까마귀 작전'(Operatie Kraai)이라는 2차 군사 공세를 개시하여 임시 수도 욕야카르타(Yogyakarta)를 점령하고 수카르노 등 지도부를 체포하였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군은 게릴라전을 계속하였고, 국제 사회의 비난이 거세졌다.

종전과 독립

미국은 네덜란드에 마셜 플랜 원조 중단을 위협하며 압박을 가하였다. 1949년 8월부터 11월까지 헤이그에서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원탁 회의가 열렸고, 네덜란드는 서뉴기니(당시 네덜란드령 뉴기니)를 제외한 구 네덜란드령 동인도 전역에 대한 주권을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Republic of the United States of Indonesia)에 이양하기로 합의하였다. 1949년 12월 27일, 공식적으로 주권이 이양되면서 인도네시아 독립 전쟁은 종결되었다.

피해 규모

인도네시아 측 사망자는 전투원과 민간인을 합쳐 약 45,000명에서 100,000명으로 추정된다. 네덜란드군은 약 4,585명(전사 2,479명, 질병 및 사고사 2,106명)이 사망하였고, 영국군(대부분 인도인 병사)은 약 980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자바와 수마트라에서는 약 7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전후 처리

인도네시아는 독립과 함께 네덜란드령 동인도 식민 정부의 채무 45억 휠던(길더)을 승계하였다. 이 채무는 2002년에 최종적으로 완전 상환되었다. 1950년까지 인도네시아 합중공화국의 연방 체제는 해체되고 단일 공화국으로 전환되었다.

네덜란드의 사과

2013년 네덜란드 정부는 인도네시아 국민에 대한 폭력에 대해 공식 사과하였다. 2020년 3월, 빌럼-알렉산더르 네덜란드 국왕은 인도네시아 방문 중 네덜란드군의 '과도한 폭력'에 대해 사과하였다. 2022년 2월 17일, 네덜란드 역사 연구 기관(KITLV, NIMH, NIOD)의 공동 연구 보고서는 네덜란드군이 전쟁 중 체계적이고 과도한 폭력을 사용했으며, 이는 정치적·군사적·법적 모든 수준에서 용인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같은 날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는 이에 대해 사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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