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익(李馨益)은 조선 후기의 의관(醫官)이다. 출생 연대와 사망 연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생애 충청도 대흥(大興, 현재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출신이다. 1632년(인조 10) 침술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 내의원(內醫院)의 추천으로 서울에 초청되었다. 이후 인조 11년부터 인조가 승하할 때까지 빈번히 번침(燔鍼)을 시술하여 효험이 있자, 특명으로 현령에 임명되기도 하였고 의관을 역임하였다. 번침이란 침술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침을 불에 달구어 사용하는 방법으로 추측되나, 구체적인 시술 방식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당시 이 번침술은 사술(邪術)이라는 비난과 배척을 받기도 하였다.
1645년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주치의를 역임하였으나, 세자가 사망하자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여러 차례 그의 죄를 논하는 장계가 올라왔다. 그러나 인조는 이형익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 이를 따르지 않았다. 소현세자 독살과 관련하여 일부 기록에서 이형익이 인조의 후궁 귀인 조씨와 모의하여 독살했다는 추측이 제기되나, 이는 명확히 확인된 사실이 아니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그 책임을 물어 함경북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2년 후 왕대비 장렬왕후(조씨)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특명으로 석방되어 다시 부름을 받기도 하였다.
평가 및 의의 이형익은 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의관이었으나, 동시에 번침술과 소현세자 사망과의 연관성 등으로 인해 조정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형익에 대해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난 위인"이라는 부정적 평가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의학사와 왕실 의료 체계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되는 인물이다.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위키백과,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