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노타니 전투(일본어: 一ノ谷の戦い)는 1184년 3월 20일(일본력:寿永3年/治承8年 2月7日), 일본 헤이안 시대 말기인 겐페이 전쟁(治承・寿永の乱)의 주요 전투 중 하나이다. 현재의 효고현 고베시 스마구(須磨区) 일대에 해당하는 이치노타니(一ノ谷)에서 미나모토 가문(源氏)과 다이라 가문(平氏) 사이에 벌어졌다.
배경
다이라 가문은 1183년 교토에서 추락한 후, 서쪽으로 세력을 재정비하여 옛 수도 후쿠하라(福原, 현 고베시)까지 진출하였다. 다이라 가문은 동쪽의 이쿠타 신사(生田の森)와 서쪽의 이치노타니(一ノ谷)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교토 탈환을 노렸다. 이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는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와 미나모토노 노리요리(源範頼)에게 다이라 가문 토벌을 명령하였다.
전투 경과
미나모토 군은 노리요리가 대로군(大手軍) 5만여 기를 이끌고 동쪽의 이쿠타구치(生田口)를, 요시쓰네가 측면군(搦手軍) 1만여 기를 이끌고 서쪽의 이치노타니구치(一ノ谷口)를 공격하는 협공 작전을 펼쳤다. 2월 4일, 요시쓰네군은 전초전인 미쿠사야마(三草山) 전투에서 다이라군을 야습으로 격파하였다.
본 전투는 2월 7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서사에 따르면, 요시쓰네는 70여 기의 정예 기병만을 이끌고 이치노타니 배후의 험준한 절벽(鵯越, 히요도리고에)을 말을 타고 급강하하는 기습 작전(逆落とし, 사카오토시)을 감행하였다. 이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다이라 진영은 대혼란에 빠졌고, 다이라 군은 궤주하여 많은 장수들이 전사하였다. 전투는 개시 후 약 2시간 만에 미나모토 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주요 사료와 해석상의 쟁점
이 전투에 관한 주요 사료로는 당대의 일기인 구조 카네자네(九条兼実)의 『교쿠요(玉葉)』, 가마쿠라 막부의 공식 사서인 『아즈마카가미(吾妻鏡)』, 군담 문학인 『헤이케모노가타리(平家物語)』가 있다.
사료 간 차이가 존재하는 주요 쟁점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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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낙하시(逆落とし)의 진위: 『교쿠요』에는 요시쓰네가 이치노타니를 함락시켰다는 기록은 있으나, 절벽을 말타고 급강하하는 기습 작전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이 기습 작전은 『아즈마카가미』와 『헤이케모노가타리』에만 등장한다. 이에 따라 역낙하시 자체가 후대의 창작이라는 견해도 역사학계에서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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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낙하시의 장소: 『아즈마카가미』와 『헤이케모노가타리』의 기록을 따를 경우, 장소는 현재 고베시 나가타구(長田区)에 위치한 히요도리고에(鵯越)라는 설과, 이치노타니 배후의 철괴산(鉄拐山) 동남쪽 절벽이라는 설이 대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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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력 규모: 『아즈마카가미』는 미나모토 군을 약 7만 기(노리요리 5만 6천, 요시쓰네 2만)로 기록하나, 『교쿠요』는 미나모토 군이 1~2천 기에 불과했다고 기록하여 큰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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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노테(山の手) 공격의 지휘관: 『교쿠요』는 다다 유키츠나(多田行綱)가 산노테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고 기록하나, 『아즈마카가미』에는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가 그 역할을 한 것으로 나타난다.
결과 및 영향
이 전투에서 다이라 가문은 다이라노 다다노리(平忠度), 다이라노 아쓰모리(平敦盛) 등 많은 일족 장수를 잃었고,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는 포로가 되었다. 총대장 다이라노 무네모리(平宗盛)는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을 모시고 야시마(屋島)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다이라 가문의 교토 탈환 계획은 좌절되었으며, 이후 야시마 전투(屋島の戦い)와 단노우라 전투(壇ノ浦の戦い)로 이어져 다이라 가문은 멸망하게 된다.
이치노타니 전투는 특히 구마가이 나오자네(熊谷直実)가 다이라노 아쓰모리(당시 17세)를 전사시키는 장면이 『헤이케모노가타리』에서 유명하게 서술되어, 노(能)와 가부키(歌舞伎) 등 일본 전통 예술의 소재로도 널리 활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