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PIVERSE

이진 (고려)

이진(李瑱, 1244년~1321년)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초명은 이방연(李芳衍), 자는 온고(溫古), 호는 동암(東菴)이다.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손이며, 고려 후기의 대표적 문인인 이제현(李齊賢)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생애

이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백가(百家)에 두루 통달하고 시에도 뛰어났다는 기록이 『고려사』 등에 전한다. 원종 5년(1264)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이후 충렬왕 5년(1279)과 충렬왕 6년(1280)에 두 차례 문과에 급제하였다. 광주사록(廣州司錄)과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쳤으며, 충렬왕이 시부(詩賦)로 문신들을 직접 시험하여 선발할 때 9명 중 제2등으로 뽑혔다.

기거사인(起居舍人)·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한 뒤 외직으로 안동부사(安東府使)에 부임하여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 힘썼다. 이후 군부총랑(軍簿摠郞), 우사의대부 사림원학사(右司議大夫 詞林院學士) 등을 거쳐 대사성 밀직승지(大司成 密直承旨),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충선왕이 내부의 난을 평정하고 오래된 폐단을 개혁할 즈음 이진은 상소를 올려 작위 남용의 방지, 토지 사급 정리, 관직과 관원 수의 감축, 긴급하지 않은 부역의 혁파 등을 청하였다.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정당문학 상의도첨의사사(政堂文學 商議都僉議司事)로 승진시켰고, 이후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충숙왕이 즉위한 1313년에는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임명되고 임해군(臨海君)에 봉하여졌으며, 1315년에는 과거의 고시관이 되어 진사를 선발하였다. 1320년에는 아들 이제현이 과거를 주관한 뒤 새로운 문생들을 거느리고 이진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이때 상왕(上王)이던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200석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검교정승으로 치사(致仕)하여 은퇴한 뒤에는 학문과 시와 술로 소요하다가 1321년(충숙왕 8), 78세로 사망하였다.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저서와 배향

저서로 『동암집(東菴集)』이 전한다. 사후 충청북도 충주에 위치한 도통사(道統祠) 등에 배향되었다.

평가와 비판

『고려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이진은 체격이 크고 도량이 넓은 인물로 묘사되었으나, 한편으로는 조정에 있으면서 독자적인 건의가 적었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또한 아들 이제현의 세력을 등에 업고 남의 노비를 여러 건 탈취한 일이 많아 이로 인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전한다. 이와 관련하여 교감(校勘) 최면(崔沔)이 이진의 집 문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으며, 변위도감(辨違都監)의 판결에 따라 노비가 원래 주인에게 반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가족

  • 증조: 이승고(李升高)
  • 조부: 이득견(李得堅), 상의직장동정 역임
  • 부인: 박인육(朴仁育)의 딸
  • 장남: 이관(李琯)
  • 차남: 이제현(李齊賢, 1287~1367), 문하시중·계림부원군 역임, 문충공(文忠公)
  • 삼남: 이지정(李之正)

한편 이진과 동명이인으로, 고려 후기에 지도첨의상의(知都僉議商議)·첨의평리(僉議評理)·처인군(處仁君) 등을 역임한 동명의 문신이 별도로 존재한다. 이 인물은 1303년 충선왕의 왕위 계승을 저지하려는 세력을 막는 데 공을 세웠으며, 1351년(충정왕 3) 지도첨의상의를 거쳐 1354년(공민왕 3) 첨의평리가 되었고, 같은 해 11월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천추절(千秋節)을 축하하고 귀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 두 번째 이진의 생몰 연대와 출생지 등은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주요 참고 자료로는 『고려사』 권109 열전제22, 『고려사절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이 있다.

둘러보기

더 찾아볼 만한 주제

    전체 문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