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이장곤(李長坤, 1474년~1519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벽진(碧珍)이며, 자는 희강(希剛), 호는 학고(鶴皐)·금헌(琴軒)·금재(琴齋)·우만(寓灣)이며, 시호는 정도(貞度)이다. 아버지는 참군 이승언(李承彦)이며,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생애
1492년(성종 23) 유자광(柳子光)에 의해 유장(儒將)의 적격자로 천거되었고, 1495년(연산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였으며,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다. 1502년(연산군 8) 알성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04년 교리(敎理)로 재직 중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이듬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연산군이 이장곤의 무예와 용맹을 두려워하여 처형하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함흥으로 도주하여 양수척(楊水尺, 떠돌아다니며 천업에 종사하던 무리)의 무리에 숨어 지내며 목숨을 부지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박원종(朴元宗)의 추천으로 복권되어 교리, 장령,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학문과 무예를 겸비하여 중종의 큰 신임을 받았다.
1510년(중종 5)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12년에는 야인(野人) 2,000여 명이 창성(昌城)을 침입하자 군사를 이끌고 이를 격파하였다. 1513년 이조참판, 1514년 예조참판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렀으며 병조판서를 겸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당시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이 주도하는 사림 처벌 논의에 참여하였으나,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신진 사류의 처형에는 반대하였다. 이로 인해 심정 등의 미움을 사서 관직을 삭탈당하였고, 이후 경기도 여강(驪江)과 경상도 창녕에서 은거하였다.
사후
사후 경상남도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대동리에 있으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96호로 지정되었다. 묘소 뒤편에는 제주도 돌하르방과 유사한 형태의 특이한 석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집으로는 《금헌집(琴軒集)》이 있다.
관련 매체
- 드라마 《왕과 비》 - 배우 이한위
- 드라마 《여인천하》 - 배우 박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