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생(李陽生, 1423년~1488년)은 조선 전기의 무신·군인으로,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종직(李從直)이다. 조선 전기 사회의 서얼·천민 출신 신분 제약 속에서도 무공을 세워 공신에 책록되고 종2품 포도대장에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로 평가된다.
출생과 가계
이양생은 1423년(세종 5년)에 태어났으며 정확한 생일은 전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대호군 이만실(李蔓實)이며, 고려 말 월성부원군 이지수(李之秀)의 5대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이종직의 노비였으며, 그는 비첩 소생의 얼자(孽子)였다. 《성종실록》의 졸기에는 "경주 사람으로 군수 이종직의 첩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생애 초반
그는 어린 시절 가죽신과 짚신을 만들어 시장에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다. 글을 읽지 못했으나 무예(武藝)에 뛰어나,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에 측근 무사로 가담하였다. 세조 즉위 후 장용위(壯勇衛)의 군졸로 배치되어 무관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시애의 난 진압과 공신 책록
1467년(세조 13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발생하자 그는 토벌군의 선봉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정충적개공신(精忠敵愾功臣) 3등에 책록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작되었으며, 이후 가선대부(嘉善大夫)까지 승진하였다.
포도대장으로서의 활동
이양생은 평생 겸사복(兼司僕)과 포도장(捕盜將, 포도대장)으로 활동하며 도성 내외와 전국 각지에서 발생하는 도적 소탕에 공을 세웠다. 그중 관악산 일대의 고도(古道)·김말응(金末應) 등의 소탕과 충주 수리산, 여주 강금산 일대의 도적 소탕이 특히 유명하다. 그는 호랑이와 도적을 다수 체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서얼 출신이라는 신분적 제약 때문에 현직(顯職)에는 등용되지 못하고 주로 겸사복과 포도장에 번갈아 임명되었으나, 이에 대해 불평을 나타내지 않고 직무에 충실하였다고 전한다.
개인적 인품과 일화
이양생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일화는 노비 출신 본부인과의 관계이다. 그의 첫 부인은 정희왕후의 조카 윤보(尹甫)의 집 노비였는데, 외모가 박색이고 자녀를 낳지 못했음에도 그는 주변의 이혼 권고를 물리치고 평생 본부인과 해로하였다. 그는 조정에 여러 차례 건의하여 1470년(성종 1년)에 본부인의 면천 속량을 허락받았다.
또한 부인의 옛 상전 집을 지나칠 때면 방문하여 비로 쓸면서 예를 갖췄다고 하며, 옛날 자신이 신을 팔던 시장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옛 지인들과 땅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러한 행적은 당대에 그의 인품과 분수를 아는 사람으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사후
1488년(성종 19년) 4월 8일에 사망하였다. 사망 원인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시호는 양평(襄平)으로 추서되었는데, "일로 인해 공이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다스려서 잘못이 없는 것을 평(平)이라 한다"는 의미에 따른 것이다.
그에게는 친아들이 없어 적형(嫡兄) 이길상(李吉祥)의 아들 이오(李晤)를 양자로 입양하여 본가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묘소 위치는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
이양생은 노비와 서얼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무공을 통해 공신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서, 조선 전기 신분제 사회에서 입지전적 인물의 사례로 꾸준히 회자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