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지(李釋之, ?~?)는 고려 후기에 활동한 문신으로, 본관은 영천(永川)이며 호는 남곡(南谷)이다. 생몰 연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이석지는 고려 말기의 학자인 이곡(李穀)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341년(충혜왕 복위 2) 목은 이색(李穡)과 함께 성균시(成均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1347년(충목왕 3)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재임할 당시 이색을 비롯한 여러 학사들과 함께 조정의 잘못된 일을 직간하다가 재상의 뜻에 거슬려 외직으로 좌천되었으며, 이후에도 여러 차례 배척을 겪은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경상도안렴사(慶尙道按廉使),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뒤 고려의 국운이 다했음을 직감하고 지금의 경기도 용인 지역인 남곡으로 물러나 은거하였다. 그의 호 '남곡'도 이곳에 은거한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문장가로 이름난 한수(韓修), 성석린(成石璘) 등과 시문으로 교유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이석지는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두문동 72현은 고려가 멸망한 뒤 새 왕조인 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은거를 택한 고려 유신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석지의 가계를 살펴보면, 고조는 전공판서 이득분이며, 증조는 보승호군 이문경, 조부는 판도판서 이송현이다. 부친은 경덕재생으로 판도판서에 추봉된 이흡이며, 모친은 영천 윤씨 윤취의 딸이다. 슬하에 5남 3녀를 두었으며, 아들로는 관찰사 이안우, 직제학 이안직 등이 있다.
저술로는 목판본 1권 1책의 『남곡유사(南谷遺事)』가 남아 있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고림동 오리골에 있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경상북도 영천시의 구인사(求仁祠), 전라남도 광주의 대치사(大峙祠) 등에 배향되었고, 경기도 용인시의 남곡재(南谷齋)에서 향사가 이어지고 있다.
이석지의 생애와 활동에 대해서는 『고려사』 및 디지털한국학 관련 백과사전 자료(디지털영천문화대전, 디지털용인문화대전 등)에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