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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삼평

이삼평(李參平, 1579년~1655년)은 조선 중기의 도공(陶工)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가 일본 사가현(佐賀縣) 아리타(有田) 지역에서 백자 생산의 기초를 마련하였으며, 일본 아리타자기(有田燒, 이마리자기)의 시조로 평가된다. 일본식 이름은 가네가에 산베에(金ヶ江三兵衛)이다.

출생과 조선에서의 행적

이삼평의 조선에서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기록이 부족하다. 출생지는 충청도 공주(현 충청남도 공주시) 지역으로 추정된다. 일본식 성씨인 가네가에(金ヶ江, 금강)가 그의 고향인 금강도(金江島)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점, 정유재란 당시 계룡산 부근에서 납치되었다는 기록, 그리고 아리타 초기 가마의 형태가 공주 학봉리 가마와 유사하다는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된다. 다만 이를 확증할 당대의 명확한 사료는 부족한 상태이다.

일본으로의 이주

1597년(선조 30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군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군대에 의해 조선에서 납치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 측 기록(다쿠 가문 문서)에 따르면 이삼평은 왜군에 길을 안내하는 등 협력한 공로로 일본으로 데려가게 되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처음에는 가라쓰(唐津) 지역에 상륙하였으며, 이후 나베시마의 가신인 다쿠 야스토시(多久安順)의 보호 아래 다쿠(多久) 지역에 거주하였다.

백토 발견과 아리타자기의 탄생

이삼평은 도자기의 원료인 양질의 고령토(백토)를 찾기 위해 나베시마 가문의 영지를 전전하였고, 1616년경 아리타 동부의 이즈미산(泉山)에서 고령토 광산을 발견하였다. 이후 덴구다니(天狗谷)에 가마를 세워 일본 최초의 백자(자기)를 구워내는 데 성공하였다. 이로써 아리타자기(有田燒)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삼평이 발견한 백토 광산과 그가 세운 가마는 이후 아리타 지역이 일본 최대의 도자기 생산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리타자기의 발전과 세계 수출

이삼평의 성공 이후 아리타에는 많은 조선 출신 도공들이 모여들었고, 나베시마 번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아리타자기는 급속히 발전하였다. 아리타에서 생산된 자기는 인근 이마리(伊万里) 항구를 통해 수출되었기 때문에 이마리자기(伊万里燒)라고도 불린다. 17세기 중반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유럽으로 대량 수출되기 시작하였으며, 첫 수출 이후 약 70년간 약 700만 점이 세계 각지로 판매되었다. 이는 18세기 유럽에 불어닥친 자포네스크(Japonism) 열풍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말년과 사후

이삼평은 아리타에 정착하여 가네가에(金ヶ江)라는 성을 하사받고, 백토 광산의 채굴권과 함께 자손 대대로의 녹봉을 보장받았다. 아리타의 절인 류센지(龍泉寺)의 장부 기록에 따르면 1655년에 사망하였으며, 계명(法名)은 월창정심거사(月窓浄心居士)였다.

사후 아리타 지역에서는 이삼평을 도자기의 시조라는 의미에서 도조(陶祖)로 받들고 있다. 아리타의 도잔 신사(陶山神社)는 오진 천황,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함께 이삼평을 제신으로 모시고 있으며, 1917년에는 아리타자기 창업 300주년을 기념하여 '도조 이삼평 비(陶祖李參平碑)'가 세워졌다. 매년 5월 4일에는 도조 축제가 열린다. 1959년에는 덴구다니 가마 부근에서 이삼평의 계명이 새겨진 묘석 하부가 발견되어 시로카와 묘지로 옮겨졌으며, 이 묘석은 아리타 정(町)의 지정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990년에는 그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에 한일 합동 기념비가 세워졌다.

역사적 평가와 논란

이삼평이 아리타자기의 원조라는 점에 대해서는 1610년대 전반부터 아리타 서부에서 이미 자기 생산이 이루어졌다는 조사 결과가 제기되면서 일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리타자기의 탄생과 발전에 이삼평을 비롯한 조선 출신 도공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는 점은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한편, 일본 측 기록에는 이삼평이 정유재란 당시 왜군에 적극 협력(부왜, 附倭)하였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이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관점에 따라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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