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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룡

이봉룡(李鳳龍, 1914년 8월 3일 ~ 1987년 1월 9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가수 겸 대중음악 작곡가이다. 아명(兒名)은 이봉용(李鳳用)이다.

생애

전라남도 목포에서 출생하였다. 가수 이난영(본명 이옥례)의 오빠이며, 어려운 가정 환경에서 성장하였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음반 상점을 운영하였고, 두 살 아래의 여동생 이난영을 가수로 데뷔시켰다. 이봉룡 자신은 1934년 가수로 먼저 데뷔하였고, 1930년대 후반부터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매제(妹弟)인 작곡가 김해송으로부터 음악 이론을 배워 작곡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요 작품 활동

이봉룡은 가수 남인수가 부른 〈낙화유수〉와 〈남아일생〉 등 널리 불린 노래를 다수 작곡하였다. 특히 1942년 여동생 이난영이 부른 〈목포는 항구다〉가 크게 히트하면서 대중음악 작곡가로서 명성을 확립하였다. 이 곡은 〈목포의 눈물〉과 함께 목포를 상징하는 곡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다. 그 외에 〈고향설〉, 〈선창〉, 〈연락선은 떠난다〉, 〈화류춘몽〉, 〈아주까리 등불〉, 〈김치깍두기〉 등의 작품이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 말기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군국가요 작곡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이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남북 분단을 소재로 한 〈달도 하나 해도 하나〉로 광복 후에도 명성을 유지하던 중, 1950년 한국전쟁 발발로 매제 김해송이 행방불명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봉룡은 김해송 실종 이후 여동생 이난영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하였다. 월북 가능성이 제기된 김해송의 곡들 중 일부는 대한민국에서 작곡자 이름을 이봉룡으로 바꾸어 살아남기도 하였다.

1956년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58년에는 센츄리(Century)레코드 전속작곡가로 활동하였다. 이후 1961년부터 엘케엘(LKL)레코드를 직접 운영하기도 하였다. 1969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음악 활동을 중단하였다. 1986년 잠시 귀국하여 서울에 머물렀으며, 1987년 1월 9일 사망하였다.

가족 관계

막내딸 이민자는 음악 그룹 김시스터즈의 멤버로 활동한 가수이다. 여동생 이난영과 매제 김해송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도 김시스터즈에서 활동하였다. 종교는 천주교(세례명: 모세)이다.

평가

이봉룡은 생애에 걸쳐 약 200여 곡을 작곡한 것으로 전해지며, 민요와 대중가요를 접목한 작품 세계로 한국 대중가요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다만 일제강점기 군국가요 작곡 참여 이력으로 인해 친일 논란이 존재하며, 그의 생애는 한국 근대사의 영욕을 반영한다는 지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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