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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임시정부

이란 임시정부(페르시아어: دولت موقت ايران, Dowlat-e Movaghat-e Irân)는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이란에 수립된 과도기적 성격의 정부이다. 이란 혁명 직후 팔라비 왕조가 붕괴한 뒤, 이란을 임시로 통치하던 기구로, 메흐디 바자르간(Mehdi Bazargan)이 총리를 역임하였다.

배경과 수립

1979년 1월, 샤(왕)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국외로 떠나면서 팔라비 왕조의 통치가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후 루홀라 호메이니가 추방 생활을 마치고 이란으로 귀국하여 혁명을 주도하였다. 1979년 2월 4일, 호메이니는 자유운동당(Freedom Movement of Iran) 출신의 저명한 정치인 메흐디 바자르간을 총리로 지명하는 칙령을 발표하고, 그를 이른바 "임시 이슬람 혁명 정부"의 수반으로 임명하였다. 호메이니는 이 칙령에서 바자르간이 신정(神政)에 기반한 정부의 수반이므로 국민은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한편, 샤가 떠나기 전 임명한 마지막 총리 샤푸르 바흐티아르도 여전히 총리직을 주장하며 정통성을 다투었다. 약 일주일 동안 바자르간과 바흐티아르가 각각 정부의 합법적 수반임을 자처하다가, 1979년 2월 11일 이란 군대가 혁명 세력 편에 서서 중립을 선언하면서 바흐티아르는 프랑스로 망명하고 분쟁이 종결되었다. 이 날은 이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 기념일로 기념된다.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이 시기를 정부 수립일로 보기도 하나, 수립 시점에 관해서는 자료에 따라 2월 4일, 2월 5일, 2월 11일 등으로 차이가 있다.

정부의 구성과 성격

바자르간은 2월 14일 7명으로 구성된 내각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내각이 확대·개편되었다. 이브라힘 야즈디가 외무장관을 지냈고, 내각 구성원들은 대부분 자유운동당, 민족전선(National Front), 이슬람 인민당 등 혁명에 참여했던 다양한 정치 세력에서 포진하였다. 한국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정부는 크게 온건파와 급진파의 두 계열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임시정부는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기 어려웠다. 혁명을 이끈 호메이니가 막후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였고, 정부는 혁명평의회(Council of the Islamic Revolution)와 병행하여 운영되면서 의사 결정 과정에서 충돌과 혼선을 겪었다. 바자르간은 이 정부를 스스로 "날이 없는 칼"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역사학자 사미 K. 파르순 등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혁명평의회에 "종속적(subordinate)"인 위치에 있었다고 평가된다.

해체

1979년 10월 24일 국민투표를 통해 이란 이슬람 공화국의 신헌법이 채택되었고, 새 헌법은 12월 3일 발효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그 이전인 1979년 11월 4일, 호메이니의 승인을 받은 학생 단체가 주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하고 미국인 인질들을 붙잡는 사건(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사건, 이른바 "인질 위기")이 발생하였다. 이틀 후인 11월 6일, 바자르간과 내각 전체는 사임을 발표하였다. 바자르간은 사임 서한에서 "반복된 간섭, 불편, 반대와 논쟁으로 인해 (임시정부가) 임무를 계속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며 사임 이유를 밝혔다.

바자르간 정부가 사임한 후에는 혁명평의회가 정부의 역할을 승계하였고, 이후 제2차 이란 임시정부(1979~1980년)가 구성되어 1980년 8월 12일 첫 이슬람 협의회(의회)가 수립되기까지 이란을 이끌었다. 바자르간은 이후 테헤란 지역구 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의의

이란 임시정부는 이란 혁명 이후 팔라비 왕조에서 이슬람 공화국 체제로의 전환 과정에서 수립된 최초의 과도 정부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혁명 직후의 혼란한 정치적 과도기에 국가 운영을 담당하였으나, 실질적인 권력이 호메이니와 혁명평의회에 집중되면서 제한적인 역할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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