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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형 (문익공)

이덕형(李德馨, 1561년 2월 12일 ~ 1613년 10월 9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으로, 이에 따라 문익공(文翼公)으로 불린다. 본관은 광주(廣州)이며,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쌍송(雙松)·포옹산인(抱雍散人)이다.

생애 초기

1561년 한성부 남부 성명방(지금의 서울 남대문과 필동 사이)에서 아버지 이민성(李民聖)과 어머니 문화 류씨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학에 뛰어났으며, 영의정 유전의 외조카로서 경기도 포천에서 지내며 당대의 명사 양사언 형제들과 교류하였다. 윤우신(尹又新)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이항복(李恒福)과 절친한 사이로 유명하다.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의 사위가 되었다.

1580년(선조 13년) 약관 20세의 나이로 별시 문과에 을과 1위(전체 2위)로 급제하였고, 이후 승문원에 보직되었다. 1583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고, 이후 부수찬·정언·부교리·이조좌랑 등을 거쳐 1590년 동부승지·대사간·부제학·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1591년에는 31세의 나이로 예조참판 겸 대제학에 올랐는데, 이는 당대 최연소 대제학이었다.

임진왜란 시기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류성룡, 이항복 등과 함께 전략을 수립하였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충주에서 회담을 요청하자 단기(單騎)로 적진으로 향했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왕을 평양까지 호종한 후 청원사(請援使)로 명나라에 파견되어 파병을 성취시켰다. 돌아와 대사헌이 되어 명군을 맞이했으며, 한성판윤으로 명장 이여송(李如松)의 접반관이 되어 전란 중 줄곧 함께 활동하였다.

1593년 병조판서, 이듬해 이조판서 겸 훈련도감당상을 지냈다. 1595년 경기·황해·평안·함경 4도체찰부사가 되었다. 정유재란(1597년) 때에는 명나라 어사 양호(楊鎬)를 설복하여 서울 방어를 강화하였고, 직접 명군과 함께 울산까지 동행하여 군사를 위무하였다. 같은 해 우의정에 승진하고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이순신이 하옥되었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변호하였다.

전란 이후

1601년 행판중추부사로서 경상·전라·충청·강원 4도체찰사를 겸해 전란 뒤의 민심 수습과 군대 정비에 힘썼으며, 대마도 정벌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602년 영의정에 올랐다. 1604년 호성공신에 추천되었으나 극력 사양하였다. 1608년 광해군 즉위 후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같은 해 정운원종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1612년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최후

1613년 이이첨 등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의 처형과 인목대비 폐모론을 제기하자, 이항복과 함께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이에 삼사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었고, 용진(龍津)으로 물러났다. 이후 병으로 경기도 광주부(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송촌리)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광해군에 의해 곧 복관되었고, 이후 인조반정(1623년) 후에도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다. 1630년(인조 8년) 문익(文翼)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경기도 포천시의 용연서원(龍淵書院)에 배향되었으며, 문경의 근암서원에도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

평가 및 일화

이항복과의 각별한 우정으로 유명하며, '오성(오성부원군 이항복)과 한음(한음 이덕형)'이라는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의 원군을 요청하는 외교적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점과, 전후 복구와 군비 정비에 기여한 점이 주요 업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옹호하다가 몰락한 점에서 소신 있는 신하로 평가받는다. 글씨에도 능하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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