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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붕

이기붕(李起鵬, 1896년 12월 20일 ~ 1960년 4월 28일)은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호는 만송(晩松)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서울 출생으로 효령대군의 17대손이다.

생애 초기

1915년 서울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 형편으로 중퇴하였다. 이후 선교사 무스(Moose, J. R.)의 통역으로 일하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아이오와주의 데이버대학(Dayver University) 문과를 1923년 졸업하였고, 뉴욕에서 허정 등과 함께 『삼일신보』 발간에 참여하였다. 1934년 귀국 후 충북 영동의 광산 사업에 투자하였다.

정치 활동

광복 후 미군정청에서 군정재판장 통역을 역임하였고, 민주의원 의장이던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비서가 되었다. 1946년 대한기독청년회·대한적십자사 등의 이사를 지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 활동하였고,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 4월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어 신성모 전 장관 시절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을 수습하였다. 같은 해 12월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발췌개헌안 통과에 관여하였다.

1952년 대한체육회장, 1953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었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53년 자유당 총무부장을 맡았고, 같은 해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올라 자유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1954년 제2대 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하였다. 개헌선에서 1표가 부족하여 일단 부결되었으나, 이른바 '사사오입(四捨五入)'을 통해 이를 번복·가결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인하공과대학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6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그해 제3대 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경기도 이천 선거구에서 제4대 민의원 의원에 당선되고 제4대 민의원 의장이 되었다.

최후

1960년 3월 15일 제5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공천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혁명으로 부통령 당선을 사퇴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자,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 관사 36호실에 피신하였다가 1960년 4월 28일 맏아들 이강석의 총격으로 집단 자살하였다. 부인은 박마리아, 아들은 이강석·이강욱이다. 그가 살던 서대문의 집은 4·19혁명학생도서관이 되었다.

평가

이기붕은 이승만 정부 시기 '민족의 달'로 불리며 이승만에 버금가는 권력자로 군림하였으나, 사사오입 개헌과 3·15 부정선거 등 부정한 정치 행위에 깊이 관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4·19혁명으로 촉발된 일가의 비극적 최후는 제1공화국의 종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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