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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

이괄의 난(李适의 亂)은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 1587~1624)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조선의 내란이다. 인조반정 직후의 논공행상과 관련한 불만, 그리고 반역 모의 고변(告變)과 그에 따른 압송 조치가 직접적인 발단이 되어 발생하였으며, 반란군이 수도 한양을 점령하고 국왕 인조가 공주까지 피난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조선에서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사례로는 처음 있는 일로 평가된다.

명칭과 시기

  • 명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표제를 「이괄의 난(李适의 亂)」으로, 위키백과 등은 한자 표기를 ‘李适ㅡ亂’으로 제시하는 등 표기상의 차이가 있다.
  • 시기: 여러 사전·향토문화 자료는 발발을 1624년 1월 24일(음력 1월 22일), 진압을 2월 15일(음력 2월 14일 밤)로 제시한다. 음력과 양력 표기가 문헌마다 혼용되어 세부 날짜에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1624년 정월에 시작되어 같은 해 2월 중에 종결된 것으로 서술된다.

배경

이괄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인조를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으나, 반정 계획에 늦게 참여하였다는 이유 등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이후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북방(평안도 영변)에 부임하였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 공신 세력은 반대 세력에 대한 경계가 강하여 반역 음모 혐의로 고변·처벌되는 사례가 적지 않았고, 이괄도 그 대상 가운데 하나였다.

1624년 정월 문회(文晦)·허통(許通)·이우(李佑) 등이 이괄과 그의 아들 이전(李栴), 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이 변란을 꾀한다고 고변하였다. 조사 결과 역모의 단서는 확인되지 않아 무고로 판명되었으나, 집권층은 이괄을 압송·국문하고 부원수직에서 해임하자는 논의를 진행하였다. 인조는 이괄 처벌 논의는 묵살하였지만, 군중에 있던 이괄의 외아들 이전을 조사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으로 파견하였다.

전개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처형되면 자신도 온전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파견된 사자들을 죽인 뒤 1624년 정월 22일(음력)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을 선봉으로 삼아 휘하 병력 1만여 명(1만 2천여 명으로 제시하는 자료도 있음)을 이끌고 영변에서 거병하였다. 모반 혐의로 압송 중이던 구성부사 한명련을 중도에서 구출하여 가담시켰다.

반란군은 도원수 장만(張晩)이 주둔한 평양을 피해 샛길로 남하하였고, 황주 신교(薪橋)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선봉장 박영서 등을 사로잡아 죽였으며, 마탄(馬灘, 저탄)과 임진강 일대에서도 관군을 격파하였다. 이에 인조 이하 조정 대신들은 서울을 떠나 수원을 거쳐 천안·공주로 피난하였다.

반란군은 같은 해 2월 11일(음력) 한양에 입성하여 경복궁 옛터에 주둔하고, 선조의 아들 흥안군 이제(興安君 李瑅)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한편 서울에서는 이괄의 아내와 동생 등이 처형되었고, 조정은 기자헌 등 내응이 우려되는 인물 약 35~40명을 처형하였다(문헌에 따라 수치에 차이가 있다).

진압과 결과

도원수 장만의 군사와 각지 관군의 연합군이 서울 근교로 추격해 와 지형상 유리한 길마재(안현, 鞍峴)에 진을 쳤고, 이를 공격한 이괄군은 대패하였다. 이괄과 한명련 등은 수백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 지금의 광희문)으로 빠져나가 삼전도를 거쳐 광주(廣州) 방면으로 달아났으나, 정충신 등이 이끄는 관군의 추격으로 흩어졌다. 1624년 2월 14일 밤(또는 15일) 이천 묵방리(墨坊里)에 이르렀을 때 부하 장수 기익헌·이수백 등이 이괄·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함으로써 난은 진압되었다.

이괄 등의 수급이 공주의 행재소에 전해진 뒤 인조는 환도하였고, 난의 진압에 공을 세운 장만·정충신·남이흥 등 32인을 진무공신(振武功臣)으로 포상하였다. 진압 후 서인 정권은 호위청 군관을 늘리고 어영청·총융청을 설치하는 등 군사력 강화를 추진하였으며, 도성 인근에 피신처가 없어 공주까지 피난해야 했던 점을 들어 남한산성 축조를 서둘렀다. 대외적으로는 반란에 실패한 한명련의 아들 한윤 등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국내 정세의 불안을 알리고 남침을 종용한 것이 1627년 정묘호란의 원인의 하나로 작용한 것으로 서술된다.

해석과 평가

종래의 통설은 이괄이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은 당시 후금의 위협으로 북방 경비가 중대했던 정세와 부원수 임명의 경위를 들어, 인사 조치에 대한 불만을 반란의 직접적 원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견해를 함께 제시한다. 또한 무고로 판명된 사안에 대해 집권층이 이괄을 계속 의심하고 아들을 압송하려 한 데 대한 이괄의 불안이 작용한 측면을 들어, 사전 계획에 의한 반란이라기보다 집권층의 의구심으로 야기된 우발적 성격의 반란으로 보는 해석도 제기된다. 즉 난의 원인에는 이괄 개인의 책임 못지않게 당시 집권층의 대응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평가가 존재한다.

아울러 국왕이 서울을 떠나 피난한 사태는 집권층과 일반 민중 모두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집권층의 감시·통제 강화로 민심이 오랫동안 안정되지 못한 것으로 서술된다.

참고 자료

  • 「이괄의 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괄의 난」, 사료로 본 한국사(국사편찬위원회), 『인조실록』 권4, 인조 2년 1월 21일
  • 「이괄의 난」, 디지털세종시문화대전·디지털천안문화대전(한국학중앙연구원)
  • 「이괄의 난」, 위키백과 및 관련 단행본·논문(박기훈 2021, 장정수 2022, 한명기 2016 등)

※ 위 서술은 공신력 있는 백과사전·사료 자료에 근거한 것이며, 세부 날짜와 처형 인원수 등 일부 수치는 자료 간 차이가 있어 어느 하나로 단정하지 않고 병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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