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국(李康國, 1906년 2월 7일 ~ 1956년)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직후에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자 정치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초기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도 활동하였다. 본관은 수안(遂安)이며, 호는 이촌(耳村)이다. 북한에서는 리강국으로도 표기되었다.
경기도 양주 출생으로, 1925년 보성고등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진학하여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을 학습하였다. 1926년 유진오 등이 조직한 경제연구회에 가입하여 『자본론』, 『금융자본론』 등의 저작을 연구하였다. 1927년 경성제대 법문학부에 진학하였고, 1930년 졸업 후 미야케(三宅) 교수의 경제학교실 조수로 채용되기도 하였다.
1931년 최용달·박문규 등과 함께 조선사회사정연구소를 창립하여 사회 각 분야의 실증적 조사 연구 활동에 참여하였다. 1932년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법철학과에 유학하여 헌법과 행정법을 전공하는 한편, 혁명적아세아인협회 및 프롤레타리아 과학동맹 등에서 활동하였고 같은 해 독일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독일 유학 중에는 코민테른의 각종 테제를 국내에 전달하는 활동을 하였다.
1935년 '미야케 교수 적화공작사건'과 관련하여 귀국한 뒤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36년에는 인민전선론에 기초하여 최용달·이주하 등과 원산 적색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하였다. 1938년 다시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집행유예를 받고 1943년 석방되었다. 1944년에는 여운형의 건국동맹에도 관여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서기장과 조직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공화국으로 해소되었을 때 총 55명의 인민위원 중 1인으로 선출되었으며,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에 참여하였다. 1946년 2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및 사무국장으로 활동하다가, 같은 해 9월 미군정의 정책을 비판하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박헌영과 함께 체포령이 내려지자 월북하였다.
북한에서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외무국장,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당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및 외무성 공동차석부상, 같은 해 상업성 법규국장, 1950년 12월 인민군 제69호 병원장, 1952년 무역성 일반제품 수입상사 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3년 3월 남로당계 숙청 과정에서 '미제국주의 고용간첩 박헌영·리승엽 도당의 정권 전복 음모와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이후 노동당 당적에서 제명되어 1956년경 사형 집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형 시점에 대해서는 1955년이라는 기록도 존재하여 정확한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한편, 2001년 공개된 미군 정보장교 소령 조지 실리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강국이 미군 방첩대 요원으로 분류되었다는 내용이 드러나 그의 이중적 성격에 대한 논의가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이에 대한 해석은 학술적으로 논쟁의 여지가 있다.
대표 저서로 『민주주의 조선의 건설』(1946)이 있으며, 이에 대한 연구서로 심지연의 『이강국연구』(백산서당, 2006)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