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후에(베트남어: Nguyễn Huệ, 阮惠, 1753년 ~ 1792년 9월 16일)는 18세기 후반 베트남 대월(大越)의 군사 지휘관이자 혁명가로, 떠이선(Tây Sơn) 왕조 부춘(Phú Xuân) 조정의 제1대 황제(재위: 1788년 ~ 1792년)이다. 본명은 응우옌반후에(Nguyễn Văn Huệ, 阮文惠)이며, 재위 연호인 '광중(光中, Quang Trung)'에서 따와 꽝쭝 황제(光中帝)라고도 불린다.
생애 개요
응우옌후에는 원래 호(胡)씨 가문 출신으로, 그의 집안은 4대조 대에 응에안(Nghệ An)에서 남부의 서산읍(西山邑)으로 옮겨가 완(阮)씨 성으로 바꾸었다. 아버지 호비복(胡丕福)은 서산채주(西山寨主)라는 하급 관직을 세습하였다. 1771년, 응우옌후에는 형인 응우옌반냑(Nguyễn Nhạc), 둘째 형 응우옌르(Nguyễn Lữ)와 함께 부패한 완(阮)씨 정권에 대항하는 떠이선 봉기를 일으켰다. 삼형제는 함께 떠이선 삼형제로 알려졌으며, 응우옌후에는 셋째 형제로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로 평가된다.
주요 업적
- 1777년 남부의 완씨 광남국(廣南國)을 멸망시키고, 탈출한 왕족을 추격하던 과정에서 응우옌 왕조의 시조가 될 완복영(Nguyễn Phúc Ánh)과의 장기 대립이 시작되었다.
- 1784년 시암(태국)·프랑스 연합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 승리로 시암 측에서 그를 '서산의 호랑이'라 부르게 되었다.
- 1786년 북부의 정(鄭)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월을 재통일하는 데 기여하였다.
- 1788년 11월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연호 '광중'을 사용하였다.
- 1789년 초, 청나라 건륭제가 파견한 대군을 옥회(玉洄) 전투에서 격파하여 베트남의 민족 영웅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청나라와 화약을 맺고 정식으로 안남왕(安南王)에 책봉되었다.
국내 정책
재위 기간 중 응우옌후에는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는 농업 조칙을 반포하고, 연령별 차등 징세 제도를 도입하는 등 행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또한 한자를 대신하여 베트남 고유 문자(쯔놈)를 공용 문자로 삼으려는 시도를 하였으나 당시 한자 사용이 보편적이었던 상황에서 반대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하였다.
사망과 이후
응우옌후에는 1792년 9월 16일, 4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현대 학계에서는 그의 사인을 뇌졸중으로 추정하고 있다. 묘호는 태조(太祖), 시호는 무황제(武皇帝)로 정해졌으며, 능호는 단양릉(丹陽陵)이다. 사후 그의 아들 응우옌꽝또안(Nguyễn Quang Toản)이 뒤를 이었으나 떠이선 왕조는 내분으로 약화되었고, 1802년 완복영이 세운 응우옌 왕조에 의해 멸망하였다.
후대의 평가
현대 베트남에서 응우옌후에는 민족 영웅으로 크게 추앙받고 있다. 베트남 문화체육관광부는 그를 베트남을 대표하는 14인의 민족 영웅 중 한 명으로 선정하였으며, 베트남 각지의 학교와 거리에는 그의 이름인 '꽝쭝' 또는 '응우옌후에'가 명명되어 있다. 호치민시의 응우옌후에 보행자 거리(Phố đi bộ Nguyễn Huệ) 역시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만 당대 기록의 상당수가 후대 응우옌 왕조의 공식 사서인 《대남실록(大南實錄)》에서 작성된 것이어서, 응우옌후에에 대한 일부 서술은 그와 적대적이었던 응우옌 왕조의 관점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