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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양군

응양군(鷹揚軍)은 고려시대 중앙군인 이군육위(二軍六衛) 중 하나로, 용호군(龍虎軍)과 함께 이군(二軍)을 구성한 군단이다. 한자로는 '매 응(鷹)'과 '날릴 양(揚)'을 써서, 매가 날아오르는 듯한 기세를 뜻하는 명칭이다.

설치 시기와 배경

응양군의 정확한 설치 연대는 문헌상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고려사(高麗史)』 현종세가(顯宗世家) 8년(1017) 11월조에 용호군의 칭호가, 병지(兵志) 병제조(兵制條) 현종 9년(1018) 9월조에 응양군의 칭호가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현종 때에는 이군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 백관지 서반조에는 목종 5년(1002)에 육위(六衛)의 직원을 갖추어 둔 뒤, 그 후에 응양군과 용호군의 이군을 설치하여 육위의 상위에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설치 배경으로는 1010년(현종 원년)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국왕이 나주로 피난하면서 국왕 경호 문제가 드러난 점과, 1014년(현종 5년) 상장군 김훈(金訓)·최질(崔質)의 난을 겪으면서 시위군(侍衛軍)의 필요성이 커진 점이 지적된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궁성을 시위하는 친위군으로서 응양군과 용호군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임무와 성격

응양군은 용호군과 함께 궁성을 시위(侍衛)하는 국왕의 친위군이었다. 친위군으로서 국왕과 가까이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출세에 비교적 유리한 위치에 있었으며, 군인들은 일반적으로 이군에 소속되기를 원하였다고 전한다.

편제와 규모

응양군은 1령(領)으로 편성되었으며, 1령은 약 1,000명의 군사로 구성되었다. 이는 2령을 보유한 용호군의 절반 규모로, 이군육위 가운데 가장 작은 부대였다. 장교 편제는 다음과 같다.

  • 상장군(上將軍) 1명 (정3품)
  • 대장군(大將軍) 1명 (종3품)
  • 장군(將軍) 1명 (정4품)
  • 중랑장(中郞將) 2명 (정5품)
  • 낭장(郞將) 2명 (정6품)
  • 별장(別將) 2명 (정7품)
  • 산원(散員) 3명 (종8품)
  • 위(尉) 20명 (정9품)
  • 대정(隊正) 40명 (종9품)

공민왕 때에는 장군을 호군(護軍)으로 고쳤으며, 다른 위(衛)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서열과 역할

이군은 육위보다 상위에 있었으며, 이군 내에서는 응양군이 용호군보다 서열이 높았다. 응양군의 최고 지휘관인 상장군은 반주(班主)라 불리며, 이군육위의 상장군·대장군으로 구성된 중방회의(重房會議)의 의장을 맡아 무반(武班)의 대표자 구실을 하였다. 무신정변 이후에는 중방이 무신정권 초기의 최고 권력 기구로 기능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로의 계승

고려 말에는 이군육위가 흔히 팔위(八衛)로 통칭되면서 응양군도 응양위(鷹揚衛)로 일컬어졌다. 조선 건국 이후 응양위가 속한 팔위는 태조 이성계의 친위 부대인 의흥친군좌·우위(義興親軍左·右衛)와 더불어 십위(十衛)를 구성하여 조선 초기의 중앙군으로 기능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이기백, 『고려 병제사 연구』(일조각, 1968)
  • 홍원기, 『고려 전기 군제 연구』(혜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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