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창(尹致昌, 1899년 3월 5일 ~ 1973년 10월 1일)은 일제강점기의 기업인이자 대한민국의 관료, 금융인, 외교관이다. 호는 남계(南桂)이며,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생애 초기
윤치창은 1899년 3월 5일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에서 조선 말기의 무신이자 개화파 관료였던 윤웅렬(尹雄烈)과 그의 소실 김정순(金貞淳)의 아들로 태어났다. 개화사상가 윤치호(尹致昊)의 이복 동생이며, 군의관 윤치왕(尹致旺)의 친동생이다. 또한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 윤보선(尹潽善)의 당숙이다.
1916년 경성고등보통학교(경기고등학교의 전신)를 수석으로 졸업하였고, 이후 일본에 유학하였다가 1916년 9월 귀국하였다. 1924년 미국으로 유학하여 시카고 루이스 대학(Lewis University) 상과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기업인 활동
미국 유학 중 독립운동가 손정도(孫貞道) 목사의 딸 손진실(孫眞實)과 결혼하였다. 귀국 후에는 개인 업종에 종사하였고, 1935년 처남인 손원일(孫元一, 후일 해군참모총장 역임)과 합작으로 경성부 종로 안국동에 '남계양행(南桂洋行)'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후 사업을 확장하여 중국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경성상공회의소 선거 입회인, 보영사(普榮社) 이사, 중앙연료주식회사(中央燃料株式會社) 이사, 조선금산개발주식회사 공동 대표, 조선운송주식회사 인수 운영 등 여러 기업에서 활동하였다. 1941년 창씨개명 당시 이토 치마사(伊東致昌)로 개명하였다.
관료 및 금융인 활동
1945년 광복 직후 해사대(海事隊) 창설에 참여하여 영어 교육을 담당하였다. 미군정 주둔 후 미군정청 재무부 전단국장(專亶局長)을 거쳐 1947년 전매국장이 되었으며, 경성 지방전매국장을 겸직하였다. 1946년 조선저축은행 취체역, 1948년 조선은행(한국은행의 전신) 이사와 감사역을 역임하였고, 1949년에는 조선환금은행 이사를 겸임하며 조선은행과 조선환금은행의 통합 업무에 관여하였다.
외교관 활동
1949년 대한민국 초대 주영국 공사에 임명되어 1950년 2월 런던에 주영공사관을 개설하였다. 공사관 건물 임대와 유지 및 활동 경비 일체를 자신의 개인 재산으로 부담하였으며, 정부로부터 재정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아 1951년 5월 사직하고 귀국하였다. 재임 중 주프랑스 한국 공사의 업무도 일부 겸무하였다.
1960년 제2공화국 출범 후 외무부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12월 중동지구친선사절단장으로 중근동 지역을 순방하였다. 1961년 1월 주터키 대한민국 대사에 임명되어 2월 부임하였으며, 같은 해 7월부터 8월까지 다시 중동지구친선사절단장으로 임명되어 이라크, 레바논, 사이프러스, 요르단, 이스라엘, 이집트, 리비아, 모로코, 튀니지 등을 방문하고 요르단의 후세인 1세로부터 명예독립훈장과 국가재건훈장을 수여받았다. 1962년 4월 주터키 대사직을 사퇴하였다.
만년
1963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뉴욕에 정착하였고, 뉴욕 한인회 수석부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73년 10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사망하였으며, 뉴욕 소재 무궁화 묘지에 부인 손진실과 함께 안장되었다.
가족 관계
장인 손정도는 독립운동가 겸 감리교 목사였으며, 처남 손원일은 대한민국 해군 창군의 주역이자 해군참모총장과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장남 윤종선은 생화학 박사로 뉴욕치과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상훈
- 1949년 문교부 장관 표창장(서울특별시 교육시설 확충 유공)
- 1949년 국무총리 표창장(경제연감 발행 유공)
- 1961년 요르단 명예독립훈장 및 국가재건훈장
- 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표창장(해외친선사절단 중동지구 참여 유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