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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득우

윤득우(尹得雨, 1719년 2월 9일~1774년 8월 7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자는 윤경(潤卿)이다. 조선 말기의 관료 윤웅렬(尹雄烈)과 윤영렬(尹英烈) 형제의 재종조부(再從祖父)에 해당한다.

출생과 가계

할아버지는 윤세겸(尹世謙)이고, 아버지는 고령현감을 지낸 윤옥(尹沃)이며, 어머니는 용인 이씨 이보명(李普溟)의 딸이다. 6대조는 조선 중기의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와 이조판서 윤근수(尹根壽) 형제로, 이들로부터 서인(西人)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면서 윤득우는 소론(少論)에 속했다.

관료 생활

1747년(영조 23)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1751년(영조 27) 영조의 환후 회복과 왕세손 책봉을 기념하여 특별히 개최된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홍문록에 올라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752년 병조정랑, 부사과, 편집청 낭청, 춘추관기사관, 세자시강원사서 등을 지냈다. 1753년 사헌부지평, 정언, 1754년 부교리 등을 거쳤다. 1755년 함경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북청부사 윤붕거, 문천군수 성헌조 등의 비리를 적발하여 파직시켰다. 같은 해 유생들의 상소에 연명했다가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다시 서용되었다. 1756년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등을 지냈고, 1757년 승지가 되었다.

탕평과 세자 대리청정 기간

사간원대사간 재직 중 영조의 탕평책과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시기를 무사히 넘겼다. 1762년 동래부사로 발령받았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승지가 되었다. 1762년 좌부승지, 1763년 우승지 겸 경연참찬관, 부호군,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고 같은 해 12월 좌승지, 약방부제조 등을 지냈다.

생애 후반

1763년 광주부윤(廣州府尹)으로 부임하였으며, 광주유수 재직 중 유민도(流民圖)와 서장대의 지형도를 그려 영조에게 올렸다. 1766년 병조참판에 임명되고, 이후 예조참판, 이조참판, 오위도총부부총관, 승정원도승지를 역임하며 수년간 영조를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1772년 대사간이 되었고, 가의대부 예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 오위도총부부총관에 이르렀다. 1773년 경주부윤으로 발령받았으며,同年 8월 7일 임지인 경주부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개성부 오음리(五音里) 아버지 윤옥의 묘소 근처에 안장되었다.

가족 관계

부인은 여산송씨(礪山宋氏)로 돈령부판사 송창명(宋昌明)의 딸이다. 아들로는 윤충동(尹忠東), 윤의동(尹義東), 윤예동(尹禮東), 윤효동(尹孝東), 윤제동(尹悌東)이 있다.

기타

윤득우는 1751년 영조대 편찬된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의 편찬자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1741년(영조 17) 봄 조사점(趙士漸)의 고산 현감 부임을 송별하는 시첩(詩帖)인 『봉산별첩(鳳山別帖)』에 조명교(曺明敎) 등과 함께 송별시를 남긴 필자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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