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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황점

유황점(硫黃店)은 조선 후기 각 군문(軍門)이 유황(硫黃)을 채굴하기 위해 설치한 광업소이다. 유황은 '석류황(石硫黃)' 또는 '황(黃)'이라고도 하며, 의약·공업 약품·화약 원료로 쓰이는 광물이다.

배경

임진왜란 이후 조선 정부는 군사 개혁의 일환으로 삼수제(三手制), 즉 포수·사수·살수로 군대를 편제하였고, 그 중심은 조총을 다루는 포수였다. 이로 인해 화약의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당시 유황은 국내에서 전혀 생산되지 않아 중국과 일본에서 비싸게 밀수입하는 데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유황의 국내 생산을 서두르게 되었고, 유황광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운영 체제

유황점은 오군영(五軍營), 비변사, 지방의 병영(兵營)과 수영(水營) 등에 속하여 운영되었다. 유황점의 운영은 다음과 같은 구조로 이루어졌다.

  • 감관(監官): 유황점의 실질적인 경영자로, 해당 군문에서 파견한 관리자였다. 광산을 발견한 사람이 감관으로 차정(差定)되는 것이 통례였으며, 발견자에게는 화전(火田)을 지급하여 역량(役糧)에 충당하게 하였다.

  • 황장(黃匠): 유황의 채굴 및 제련을 담당한 기술자(관장, 官匠)로서 임금을 받았다.

  • 유황군(硫黃軍): 군역 대신 부역 노동에 동원된 병사들로, 유황점에서 채굴 작업을 수행하였다. 유황군 1명당 유황 5근씩을 수취하였다.

발전과 쇠퇴

수어청이 1661년(현종 2) 진산(珍山)에서 최초로 유황광을 발견한 이후, 조정은 유황광 개발 정책과 함께 광산을 발견·보고하는 자에게 큰상을 내리는 시상법을 마련하였다. 이로 인해 1661년부터 1712년(숙종 38)까지 전국에서 발굴된 유황 산지는 20여 곳에 이르렀다.

그러나 18세기 초·중엽에 이르러 경향군(京鄕軍)의 광범위한 수포군화(收布軍化)로 화약 수요가 격감하고, 각 읍의 월과화약(月課火藥) 제조권이 공인(貢人)에게 이속되면서 유황점의 설점 수세 체제는 붕괴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축적된 경험과 광산 인구는 18세기 중엽 이후 잠채광업(潛採鑛業)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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