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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탁

유탁은 한국어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 단어이며, 크게 두 가지의 대표적 용법이 확인된다.

1. 유탁(遺託) — 죽은 사람이 남긴 부탁

한자어 명사로, 遺(남길 유)와 託(부탁할 탁)이 결합한 형태이다. 죽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남긴 부탁이나 당부를 가리킨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등재된 표준어이며, 문학 작품에서도 사용례가 확인된다. 예를 들어 김동인의 소설《젊은 그들》에는 "이것은 죽은 명진섭의 유탁이니 결코 어기지 말란 말이 씌어 있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고인의 유탁"과 같은 표현으로 쓰이며, 유언(遺言)과 유사한 의미 범주에 속하나 구체적으로는 사망자가 남긴 부탁·당부라는 점에 의미 초점이 있다.

2. 유탁(柳濯) — 고려 말기의 무신·관리

고려 후기에 활동한 인물로,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춘경(春卿), 호는 성재(誠齋)이다. 고흥부원군 유청신(柳淸臣)의 손자이며, 판밀직사 유유기(柳攸基)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1311년에서 1371년까지 생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문음(門蔭)으로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귀국한 뒤, 1337년(충숙왕 6) 감문위대호군이 되어 고흥군에 봉해졌다. 이후 합포만호, 밀직부사, 찬성사 등을 역임하며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공민왕 초에는 전라도 만호로 활동하며 왜구의 침입을 막았고, 「장생포(長生浦)」 등의 곡을 지어 악부(樂府)에 올리기도 하였다. 1354년(공민왕 3)에는 좌정승에 올라 고흥부원군에 봉해졌으며, 원나라의 요청으로 장사성 토벌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 당시 좌정승으로 서북면홍적방어제군도통사가 되어 방어에 힘썼고, 이듬해 흥왕사의 변을 진압하여 일등공신에 올랐다. 1365년에는 도첨의시중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368년 노국대장공주의 영전을 마암에 크게 신축하는 일에 반대하다가 투옥·파면되었으며, 이후 석방되었으나 신돈이 죽은 1371년 신돈의 일당으로 몰려 청교역에서 교수형을 당하였다. 조선 개국 후 보국고흥백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별도 항목으로 수록되어 있는 인물이다.

3. 기타 용례

이밖에도《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인물명(영릉 태수)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으며, 화학 분야에서 "유탁질" 또는 "유탁액"이라는 형태로 에멀전(emulsion)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사용된다. 다만 후자는 "유탁" 단독이 아닌 복합어 형태로 사용된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상과 같이 "유탁"은 표준국어대사전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공신력 있는 자료에 실려 있는 널리 알려진 단어이자 인명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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