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술(柳述, 570년~608년)은 수나라(隋)의 관료이자 외척으로, 자는 업륭(業隆)이다. 하동군(河東郡) 해현(解縣, 현재의 산서성) 출신이다. 수문제(隋文帝) 양견(楊堅)의 사위로, 난릉공주(蘭陵公主)와 혼인하였다.
가문과 출신
유술은 서위(西魏)의 상서좌복야를 지낸 유경(柳慶)의 손자이자, 수나라의 납언(納言)이자 기주자사(冀州刺史)를 지낸 유기(柳機)의 아들이다. 가문의 음덕(蔭德)으로 관직에 진출하여 태자 친위(太子親衛)로 시작하였다. 이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내사시랑(內史侍郎)을 역임하였다.
관직 생활과 수문제의 총애
유술은 수문제의 여러 사위 가운데에서도 특히 총애를 받은 인물로 알려져 있다. 병부상서(兵部尚書)의 직무를 담당하며 기밀을 참여하였다. 그는 자신의 공적이 부족함을 들어 사직을 청원하였으나, 문제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병부상서의 일을 계속 맡도록 하였다. 인수(仁壽) 연간에는 이부상서(吏部尚書)의 일도 겸하였다.
그는 당시 권신이었던 양소(楊素)와 대립 관계에 있었으며, 양소가 유술에게 여러 차례 모욕을 당한 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문제는 유술을 양소보다 더 중용하였다.
604년 정변과 최후
604년, 수문제가 인수궁(仁壽宮)에서 병상에 눕자 유술, 양소, 원암(元岩) 등이 궁중에서 시중들었다. 황태자 양광(楊廣)이 선화부인(宣華夫人)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일에 수문제가 격노하여, 유술에게 명하여 폐태자였던 양용(楊勇)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유술과 원암이 칙서를 작성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양소가 양광과 공모하여 유술과 원암을 체포하였다.
양광이 즉위하여 수양제(隋煬帝)가 된 뒤, 유술은 관작을 박탈당하고 난릉공주와 이혼을 강요받았다. 이후 용천군(龍川郡)으로 유배되었고, 공주가 함께 가기를 청원하였으나 양제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다시 영월(寧越)로 이배되었으며, 향년 39세로 풍토병으로 사망하였다.
출처
주요 사료로는 《수서》(隋書) 권47 열전 제12가 있다. 유술의 생애는 수문제 말년의 황위 계승 분쟁 과정과 밀접하게 관련된 인물로서, 수나라 초기 정치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