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 약 1494년~1536년)은 16세기 영국의 성서학자이자 언어학자로, 종교개혁 시기의 주요 인물이다. 그는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선구자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영어 성경 번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생애와 배경
틴들은 잉글랜드 글로스터셔(Gloucestershire) 지역에서 약 1494년경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정확한 출생 연도와 장소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다소 차이가 있으며, 일부 기록에 따르면 1484년에서 1496년 사이로 보기도 한다.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의 막달렌 홀(Magdalen Hall, 현재의 Hertford College)에서 수학하여 1512년 문학사 학위를, 1515년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517년에서 1521년 사이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그는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에도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경 번역 활동
틴들의 가장 큰 업적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그의 번역은 히브리어와 그리스어 원문에서 직접 번역한 최초의 영어 성경으로 평가된다. 이는 이전의 위클리프(Wycliffe) 번역이 라틴어 불가타(Vulgate)에 기반한 것과 대비되는 점이다. 또한 그의 번역은 인쇄술을 활용한 최초의 영어 신약성경이기도 하다.
1524년 봄, 틴들은 잉글랜드를 떠나 유럽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독일과 저지대 국가(현재의 벨기에·네덜란드 지역)에서 번역 작업을 진행했으며, 1525년 쾰른에서 신약성경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중단되었고, 1526년 보름스(Worms)에서 완전한 신약성경 초판이 인쇄되었다. 이후 1530년에는 모세오경(토라)을 번역했다.
틴들의 번역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밀수되었으나, 당시 가톨릭 교회와 잉글랜드 당국의 반대에 직면했다. 1526년 10월, 런던 주교 턴스톨(Tunstall)은 그의 번역을 공식적으로 금지하고 구매한 사본들을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신학적 입장과 저작
틴들은 마르틴 루터의 영향을 받았으나, 여러 신학적 문제에서 루터와 구별되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는 1528년 저서 《기독교인의 순종》(The Obedience of a Christian Man)에서 군주가 교황보다 교회를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주장했으며, 이는 잉글랜드에서 '왕의 신성권' 개념을 옹호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된다. 이 책은 헨리 8세의 손에 들어가 1534년 잉글랜드 교회가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되는 데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530년에는 헨리 8세의 캐서린 오브 아라곤과의 이혼(혼인 무효) 시도를 반대하는 《성직자들의 관행》(The Practice of Prelates)을 저술했다. 이로 인해 그는 국가와 교회 양쪽의 적이 되었다.
체포와 처형
1535년, 틴들은 앤트워프에서 헨리 필립스(Henry Phillips)의 배신으로 체포되어 브뤼셀 근교의 빌보르데(Vilvoorde) 성에 수감되었다. 그는 약 1년 반 동안 수감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에도 히브리어 성경 번역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1536년, 그는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 후 화형당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주여, 잉글랜드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였다고 전해진다.
유산과 영향
틴들의 번역은 이후의 영어 성경 번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611년에 출판된 흠정역(King James Version) 성경은 틴들의 번역을 광범위하게 활용했으며, 신약성경의 경우 흠정역 본문의 상당 부분이 틴들의 번역에 기반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흠정역 신약성경의 55%에서 83%가 틴들의 번역에서 유래했다고 추정한다.
틴들은 또한 '여호와'(Jehovah)라는 신의 이름을 영어 성경에 처음 사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번역은 영어 문학과 언어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2002년 BBC의 '위대한 영국인 100인' 설문에서 26위에 선정되었다.
틴들을 기리는 기념비와 동상이 런던, 브리스톨, 빌보르데 등 여러 곳에 세워져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대학, 학교, 연구 기관, 출판사 등이 여러 국가에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