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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윌버포스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년 8월 24일 ~ 1833년 7월 29일)는 영국의 정치인, 자선가, 그리고 대서양 노예 무역을 폐지하기 위한 운동의 지도자이다.

생애 초기

윌리엄 윌버포스는 1759년 8월 24일, 영국 요크셔의 킹스턴 어폰 헐에서 부유한 상인 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도 동명의 윌리엄 윌버포스로, 발트해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헐 시장을 두 차례 역임한 인물이었다. 아버지 로버트 윌버포스가 1768년 사망한 후, 윌버포스는 큰아버지 집에서 지내다가 큰아버지의 유산까지 상속받아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1776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세인트 존스 칼리지에 입학했으며, 학창 시절에는 공부보다는 사교 생활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훗날 영국 총리가 되는 윌리엄 피트(소)와 평생 지속될 우정을 쌓았다. 1780년, 불과 21세의 나이로 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으며, 이후 요크셔 지역구 의원(1784~1812)과 브램버 지역구 의원(1812~1825)을 역임하며 무소속 의원으로 활동했다.

종교적 회심

1784년에서 1785년 사이, 윌버포스는 유럽 여행 중 복음주의적 회심을 경험했다. 이는 그의 삶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후 그는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자로서 신앙에 기반한 삶과 개혁 활동에 헌신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존 뉴턴(노예선 선장 출신의 성공회 사제이자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작사자)에게 조언을 구했고, 공직에 남아 신앙을 실천하라는 권고를 받았다.

노예 무역 폐지 운동

1787년, 윌버포스는 토머스 클랙슨, 그랜빌 샤프, 한나 모어 등 노예제 폐지 운동가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이들의 설득으로 의회 내 노예 무역 폐지 운동의 선두에 서기로 결심했다. 같은 해 '노예무역 폐지 협회'가 창설되었다.

1789년 5월 12일, 윌버포스는 하원에서 노예 무역 폐지에 관한 첫 주요 연설을 했다. 그러나 노예 무역 폐지법안은 1791년에 부결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 전쟁의 발발과 정치적 보수화로 인해 수년간 진전을 보지 못했다. 윌버포스는 20년 가까이 지속된 의회 투쟁 끝에, 1807년 2월 23일 마침내 노예무역 폐지법(Slave Trade Act 1807)을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법안은 하원에서 283대 16으로 가결되었다.

노예제 완전 폐지

노예 무역이 금지된 이후에도 영국 식민지에서의 노예제 자체는 존속했다. 윌버포스는 1823년 노예폐지협회(Anti-Slavery Society)를 결성하고 노예제 완전 폐지를 위한 운동을 계속했다. 건강이 악화되어 1825년 의원직을 사퇴한 후에도 그는 이 운동에 계속 관여했다. 1833년 7월 26일, 영국 의회는 대영제국 전역의 노예제를 폐지하는 노예제 폐지법(Slavery Abolition Act 1833)을 통과시켰다. 윌버포스는 이 법안의 통과가 확실해졌다는 소식을 병상에서 듣고 사흘 후인 1833년 7월 29일, 73세의 나이로 런던에서 사망했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기타 활동과 입장

윌버포스는 노예제 폐지 외에도 다양한 사회 개혁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영국 성공회 복음주의 진영을 지지하여 1797년 저서 《실제 기독교에 대한 고찰》(A Practical View...)을 출판했으며, 이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해외 선교 활동을 지원하여 교회선교협회(Church Mission Society)의 창립 멤버가 되었고, 인도에서의 기독교 선교를 위한 법안 통과를 위해 활동했다. 또한 세계 최초의 동물 보호 단체인 왕립동물학대방지협회(RSPCA)의 창립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윌버포스는 국내 정치·사회 문제에 있어서는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1795년 인신보호영장 정지 조치와 '재갈 법안'(Gagging Bills)을 지지했으며, 1799년 노동조합 금지법(Combination Act)에 찬성표를 던졌다. 1819년 피털루 학살 사건에 대한 조사에도 반대했으며, 가톨릭 교도의 정치적 해방에 대해서는 처음에는 강하게 반대하다가 1813년 이후 입장을 선회했다.

평가와 유산

윌버포스는 영국 노예제 폐지 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사후 아들들인 로버트와 새뮤얼 윌버포스가 아버지의 전기를 출판하면서 그의 역할이 강조된 반면, 토머스 클랙슨의 기여는 상대적으로 축소되는 논란이 있었다. 현대 역사학계는 윌버포스의 의회 내 리더십과 클랙슨의 조사 및 대중 동원 작업이 함께 이루어냈기에 노예제 폐지가 가능했다고 본다.

그의 업적을 기려 헐에 있는 그의 생가는 윌버포스 하우스 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2006년 헐 대학교에 윌버포스 노예제 및 해방 연구소(Wilberforce Institute for the study of Slavery and Emancipation)가 설립되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는 그의 이름을 딴 윌버포스 대학교(1856년 설립)가 있으며, 이는 미국 최초의 흑인 소유 대학교였다. 2007년에는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가 개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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