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정척사(衛正斥邪)는 '바른 것을 지키고 그른 것을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 유교적 개념이자, 조선 후기 성리학적 가치 질서를 수호하고 외래 사상과 세력을 배척하고자 한 사상적·정치적 운동을 가리킨다. '위정(衛正)'은 정학(正學)인 성리학과 그에 기반한 사회 질서를 지키는 것을, '척사(斥邪)'는 사학(邪學)으로 규정된 천주교를 비롯한 서학(西學) 및 외래 문물을 배척하는 것을 뜻한다.
사상적 기원
위정척사 사상의 연원은 중국 남송(南宋) 시기 주희(朱熹, 1130~1200)에게서 찾을 수 있다. 주희는 여진족의 침략으로 중화 문화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춘추대의(春秋大義)를 내세워 중화 문명을 수호하고 이민족을 응징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화이론(華夷論)에 기반한 것으로, 문화와 문명의 기준에 따라 중화(華)와 오랑캐(夷)를 구별하는 인식 체계이다. 조선은 건국 이후 성리학을 국가 지도 이념으로 채택하였으며,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오랑캐로 규정하고 조선이 중화 문명의 적통을 계승하였다는 소중화(小中華) 의식이 형성되면서 위정척사 사상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역사적 전개
위정척사가 본격적으로 대두된 시기는 18세기 말 천주교가 조선에 전래된 이후이다. 정조(正祖)는 1791년(정조 15년) 이승훈(李承薰) 등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더욱 열심히 위정척사의 방책에 힘쓰도록 하라"고 언급하였는데, 이는 '위정척사'라는 용어가 사료에 직접 기록된 최초의 사례로 알려져 있다.
19세기 중엽 이후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흐름 속에서 위정척사는 더욱 체계화되었다.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9)은 위정척사 사상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대표적 학자이다. 이항로는 주리론(主理論)적 성리학에 기반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의 의리를 강조하였고, 기정진은 내수외양론(內修外攘論)을 주창하며 서양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를 겪으면서 흥선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우고 위정척사를 국론으로 표방하였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을 전후하여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일본과 서양이 동일한 존재라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주장하며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881년에는 황준헌(黃遵憲)의 《조선책략(朝鮮策略)》이 유입되자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을 중심으로 한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비롯한 전국적인 척사 상소 운동이 전개되었다.
주요 학파와 인물
위정척사 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형성한 주요 학파로는 이항로를 중심으로 한 화서학파(華西學派), 기정진의 노사학파(蘆沙學派), 류치명(柳致明)의 정재학파(定齋學派), 한원진(韓元震)의 남당학파(南塘學派) 등이 있다. 이들 학파는 성리학의 이론적 입장에서 차이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외세 배척과 전통 질서 수호라는 점에서는 공통된 입장을 견지하였다.
화서학파의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최익현, 유인석(柳麟錫) 등은 위정척사 사상을 실천적 항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최익현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을 일으켜 항일 무력 투쟁을 전개하였고, 유인석은 국외로 근거지를 옮겨 항일 독립군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였다.
역사적 의의와 평가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민족의 자존 의식을 고취하고 국권을 수호하려는 반침략적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특히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전개된 의병 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이후 항일 독립 운동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를 제공하였다.
다만 위정척사 사상은 화이론적 세계관에 기반한 보수성과 배타성을 내포하고 있어, 서양의 과학 기술과 제도 등 새로운 문물의 수용을 저해하고 근대화를 지연시킨 측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공존하며, 위정척사 운동이 근대 민족주의로 연결되는가에 대해서도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