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성왕릉(元聖王陵)은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 사적 제26호로 지정되었으며, 2011년 7월 28일 기존의 '경주괘릉'에서 '경주 원성왕릉'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원성왕의 이름은 김경신(金敬信)이며, 내물마립간의 12대 후손이다. 선덕왕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김주원과의 왕위계승 경쟁 끝에 즉위하였다. 재위 기간 중 독서삼품과(讀書三品科)를 제정하여 유교 경전에 대한 학식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를 마련하였고,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대외 교류에도 힘을 기울였다. 원성왕은 신라 하대(下代)의 실질적인 개창자로 평가되며, 이후 120여 년간 원성왕의 가계 내에서 왕위가 계승되었다.
왕릉이 조성되기 전 이곳에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원형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유해를 수면 위에 걸어 안장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삼국사기』에는 원성왕이 봉덕사(奉德寺) 남쪽에서 화장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동곡사(洞鵠寺)에 있으며 최치원(崔致遠)이 비문을 쓴 비석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 괘릉 인근에 숭복사(崇福寺) 터가 남아 있어 이 능이 원성왕릉이라는 견해를 뒷받침하고 있다.
능은 원형 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봉분 아래에는 무덤 보호를 위한 둘레석(護石)이 설치되어 있으며, 지대석 위에 면석을 놓고 그 위에 갑석을 올리는 구조로 되어 있다. 각 면석 사이에는 탱석(撑石)을 배치하여 봉토의 붕괴를 방지하였으며, 탱석에는 무복(武服)을 입고 무기를 잡은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다. 이 십이지신상은 통일신라시대의 것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호석 바깥쪽으로는 부채꼴 판석을 깔아 회랑을 조성하고, 그 둘레에는 돌기둥을 세워 돌난간을 설치하였다.
봉분 바로 앞에는 사각형 석상(石床)이 놓여 있으며, 봉분 중심에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동서 약 25m 간격으로 돌사자 두 쌍, 문인석(文人石) 한 쌍, 무인석(武人石) 한 쌍, 화표석(華表石) 한 쌍이 마주보며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이 석조물들은 2005년 보물 제1427호 '경주 원성왕릉 석상 및 석주 일괄'로 지정되었다.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힌다. 특히 무인석은 깊은 눈자위와 매부리코, 곱슬거리는 수염 등 서역인(西域人)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며, 이는 8세기 말 신라가 서역과 교류하였음을 보여주는 정황 증거로 거론된다.
원성왕릉의 무덤 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았으나, 둘레돌에 십이지신상을 배치한 것은 신라의 독창적인 요소이다. 능묘에 배치된 십이지신상은 성덕왕릉에서 따로 조각해 호석 앞에 세웠던 형식에서 발전하여 탱석에 직접 조각하는 형식으로 변화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학계 일부에서는 왕릉 조각의 제작 시기가 원성왕 사망 당시(798년)가 아니라 약 60여 년 후인 경문왕대(景文王代)에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다.
원성왕릉은 통일신라시대 왕릉 중 가장 완비된 능묘 제도를 갖춘 것으로 평가되며, 흥덕왕릉과 함께 신라 하대 왕릉 능원 양식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