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국민주의(우크라이나어: Український націоналізм)는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으로서의 단결을 촉진하고 국민 국가로서의 우크라이나 정체성을 증진하는 정치적·이념적 운동이다. 문화, 민족성, 언어, 정치, 종교, 전통, 그리고 공유된 역사에 대한 믿음이라는 단일한 국민 정체성에 기반을 둔다. 이는 오늘날 우크라이나를 연구하는 역사학·정치학 분야에서 널리 인정된 학술적 개념이며, 국제적인 공신력 있는 사전 및 백과사전에 독립 항목으로 등재되어 있다.
역사적 기원
현대 우크라이나 국민주의의 기원은 17세기 중반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이끈 폴란드-리투아니아에 대항한 코자크 봉기에서 시작되는 것으로 학계에서 일반적으로 설명된다. 흐멜니츠키는 자포로자 코자크를 지휘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우크라이나 국민 국가 정체성의 전조로 평가된다. 봉기의 결과로 자포로자 코자크는 잠시 독립 국가를 세웠으며, 이는 이후 자치적인 헤트만국(1649–1764)으로 발전하였다. 헤트만국은 1667년부터 러시아 차르의 종주권 아래에 놓였으나 한 세기 동안 지역 헤트만들이 통치했다. 이반 마제파 헤트만(1639–1709)은 18세기 초 우크라이나 문화와 역사 복원에 집중했다.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 통치 기간 동안 헤트만국의 자치권은 점진적으로 파괴되었고, 1764년 헤트만 직책이 폐지되면서 우크라이나 영토는 러시아 제국에 완전히 편입되었다. 이후 러시아 제국 지역에서는 강도 높은 러시아화가 진행되었고, 우크라이나어와 문화는 주로 민속 이야기와 노래를 통해 보존되었다.
러시아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 시기
반면 폴란드 분할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의 일부가 된 갈리치아(할리치나)와 부코비나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러시아 제국과 동일한 수준의 문화적 억압에 직면하지 않았으며, 프랑스 혁명과 미국 독립 혁명 이후 확산된 내셔널리즘의 영향을 받았다. 1848년 오스트리아 혁명 이후 루테니아인 최고 위원회가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를 수립하려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좌절되었다.
우크라이나 민족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꼽히는 시인 타라스 셰우첸코는 19세기에 시를 통해 독립적이고 주권적인 우크라이나의 사상을 표명했으며, 오늘날 우크라이나인들에게 민족 영웅이자 민족 문화 부흥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독립 시도
러시아 제국의 붕괴와 함께 우크라이나 진보주의자 협회의 주도로 키이우에 중앙 평의회가 설립되었고, 1918년 1월 22일 우크라이나를 독립 국가로 선포했다. 그러나 이 정부는 붉은 군대, 러시아 백위군, 독일군, 영불 협상국 개입 등의 압력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전간기: 소련과 폴란드 지배
소련 통치가 확고해지면서 초기에는 코레니자치아("토착화") 정책을 통해 우크라이나 문화가 부흥을 누렸지만, 1930년대 초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인들의 민족에 대한 충성심을 위험하게 여겨 우크라이나화 정책을 유혈적으로 역전시켰다. 대부분의 우크라이나 문화·정치 엘리트가 체포·처형되었으며, 홀로도모르(대기근)로 인해 민족이 크게 황폐해졌다.
한편 폴란드 제2공화국(1918–1939) 통치하의 서부 우크라이나에서는 1929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가 결성되었다. OUN은 폴란드와 소련에 대항하며 정치적 폭력을 포함한 투쟁을 전개했고, 1930년대 초에는 60건 이상의 성공했거나 시도된 암살을 감행했다. 1938년 OUN 지도자 코노발레츠가 소련 요원에 의해 암살된 이후, OUN은 온건한 멜니크파(OUN-M)와 급진적인 반데라파(OUN-B)로 분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1941년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 국가 건설의 기회를 모색했다. 스테판 반데라가 이끄는 OUN은 1941년 6월 30일 독립된 우크라이나 국가를 선포했으나 나치 독일에 의해 즉시 분쇄되었다. 이후 우크라이나 반란군(UPA)이 결성되어 독일군, 소련군, 그리고 폴란드 민간인에 대항하여 군사 작전을 벌였다. 특히 1943년부터 UPA는 볼히니아 지역에서 폴란드인에 대한 대규모 민족 청소 작전을 수행했다. 이에 대한 피해자 수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추정치가 상당히 다르며, 약 35,000명에서 500,000명 사이로 다양하게 추정된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조직의 행위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평가가 엇갈린다.
소련 후기와 독립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 정부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어떠한 흔적도 억압했으나, 흐루쇼프 해빙 이후 반체제 운동가들이 인권과 민족·문화적 권리 문제를 제기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함께 현대 우크라이나 국가가 탄생하면서, 민족적 용어의 국민주의에서 모든 영토 내 주민을 시민으로 인정하는 시민 국민주의로의 점진적인 전환이 시작되었다. 이는 러시아계 주민의 시민권을 박탈한 일부 발트 국가의 모델과는 구별된다.
1991년 독립 이후 장기간 민족주의 극우 정당들은 우크라이나 최고 라다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으며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2012년 총선에서 자유당이 전국 득표율 10.44%를 얻어 의회에 진출한 것이 예외적인 성과였다.
2014년 이후
2014년 유로마이단(존엄의 혁명)과 크림반도 합병, 돈바스 전쟁, 그리고 2022년 러시아의 전면적 침공을 거치면서 우크라이나 사회에서는 민족적·언어적 정체성보다는 친유럽적이고 민주적인 시민 정체성이 강화된 것으로 여러 학자들이 분석한다. 2022년 침공 이후에는 탈러시아화 캠페인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진행되었다.
한편 러시아 측은 우크라이나 당국을 "신나치주의"로 묘사해 왔으나, 다수의 학자와 역사가들은 극우 정당과 신나치 성향의 소규모 단체(아조프 연대 등)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이들이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러한 주장을 근거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관련 주요 조직 및 정당
역사적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관련된 주요 조직으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기구(OUN),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우크라이나 민족 회의, 우크라이나 인민운동 등이 있다. 현재 활동 중인 정당으로는 전우크라이나 연합 "자유", 우익 섹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회의, 국민단 등이 있으며, 대부분 소수의 지지에 그치고 있다.
평가와 논쟁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서구 학계에서도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일부 학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를 주권과 자기결정권의 표현으로 보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OUN과 UPA의 역사적 폭력성과 극단적 민족주의 요소를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반유대주의 및 폴란드인 학살, 나치 독일과의 관계 등은 여전히 논쟁적인 역사적 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