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단의 체르케스인(아디게어: Иорданием ис Адыгэхэр, 아랍어: الشركس في الأردن)은 19세기 후반 체르케스인 학살(1860년대)과 러시아-튀르크 전쟁(1877~1878) 이후 오스만 제국으로 강제 이주한 체르케스인 난민들의 후손으로, 현재 요르단 하셰미트 왕국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 집단이다. 이들은 스스로를 아디게(Adyghe)라고 부르며, 체르케스(Circassian)라는 명칭은 외부에서 사용되던 호칭이나 현재는 디아스포라 공동체에서 두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
인구 규모
요르단 내 체르케스인의 인구는 추정치에 따라 10만 명에서 17만 명 사이로 다양하게 보고된다. 이들은 요르단 전체 인구의 약 1~2%를 차지하며, 수도 암만(Amman) 내에서는 약 5%의 비중을 차지한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반, 차르 러시아 제국의 캅카스 지역 확장 정책으로 인해 대규모 체르케스인 난민이 발생하였다. 1860년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협정에 따라 4만~5만 명의 체르케스인이 오스만 영토로 이주하기로 합의되었으나, 실제로는 80만~120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 체르케스인이 오스만 제국으로 유입되었다. 이 중 약 17만 5천 명은 발칸 반도에 재정착하였다.
1877~18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발칸에서 체르케스인이 추방되었고,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이는 공식화되었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체르케스인 난민들을 레반트 지역의 주변부에 재정착시키는 정책을 시행하였다. 1878년 약 5만 명의 체르케스인이 콘스탄티노플, 테살로니키, 카발라에서 해상을 통해 레반트 해안으로 수송되었고, 이 중 약 2만 5천 명이 시리아 빌라예트 남부(현 요르단 지역), 골란 고원, 티베리아스 주변으로 보내졌다.
요르단 정착 과정
1878년에서 1884년 사이에 세 개의 체르케스인 마을이 설립되었다: 암만(1878년), 와디 알시르(Wadi al-Seer, 1880년), 제라시(Jerash, 1884년). 암만은 14세기 이후 버려진 도시였으나 체르케스인에 의해 재건되어 현대 도시의 기초가 마련되었다. 첫 번째 이주민 집단은 샵수그(Shapsug) 방언 집단에 속했으며, 이후 카바르디아(Kabardia)와 압자흐(Abzakh) 집단이 합류하였다.
1901~1906년의 두 번째 대규모 이주 물결에서는 체첸인 난민도 포함되어 나우르(Naour, 1901년), 자르카(Zarqa, 1902년), 루세이파(Russeifa, 1905년), 스웨일리흐(Swaylih, 1905년), 수크나(Sukhna, 1906년) 등 다섯 개의 혼합 정착촌이 암만 주변에 설립되었다.
초기 정착민들은 가혹한 환경으로 인해 많은 사망자를 기록했으며, 암만의 경우 첫 3개월 만에 정착민 수가 500명에서 150명으로 감소하였다. 생존자들은 동굴과 로마 시대 유적지에서 생활하며 장티푸스, 말라리아, 발진티푸스에 노출되었다. 1893년까지 새로운 이주민의 유입으로 인구는 약 1,000명으로 회복되었다.
체르케스인에게 할당된 토지는 전통적으로 베두인 부족의 겨울 야영지로 사용되던 곳이었다. 체르케스인은 10년간의 세금 면제와 토지 보조를 받았으며, 많은 수가 오스만 헌병대에 복무하면서 현지 베두인 및 살트(Salt) 지역 주민들과 갈등을 빚었다. 그러나 체르케스인은 헤자즈 철도 건설 및 보호, 농업 생산, 지방 행정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오스만 정부의 지역 통제 확장에 기여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요르단 지역에는 약 5,000~6,000명의 체르케스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정치적 지위
요르단 독립 이후 체르케스인은 요르단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체첸인과 함께 요르단 의회에서 헌법적으로 보장된 3석을 할당받고 있다. 또한 정부 관료제, 군대, 정보 기관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수행하며, 실제 의석 수 이상으로 장관급 인사를 배출하고 있다. 요르단 왕실의 친위대는 전통적으로 체르케스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는 하셰미트 왕가와 체르케스인 간의 오랜 신뢰 관계를 반영한다.
언어
체르케스인은 주로 아디게어(Adyghe)의 여러 방언(카바르디안, 샵수그, 압자흐, 브제두그)을 사용하였으나, 현재 요르단 체르케스인 공동체 중 약 17%만이 아디게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언어 사용은 연령에 큰 영향을 받으며, 젊은 세대일수록 아랍어 사용 비중이 높다. 프린스 함자 학교(Prince Hamza School)에서 동부 체르케스어(표준 카바르디안)를 가르치고 있으나, 대부분의 학생이 구사 능력이 제한적인 준-화자(semi-speaker) 수준이다. 체르케스어는 주로 가정 내 비공식적 구두 의사소통에 사용되며, 아랍어(요르단 아랍어)가 공식 및 일상생활 전반에서 우세하다.
종교
요르단의 체르케스인은 수니파 이슬람(하나피파)을 신봉한다. 암만의 대표적인 체르케스인 모스크로는 아부 다르위시 모스크(Abu Darweesh Mosque, 1961년 건립)가 있다.
문화와 정체성
체르케스인의 문화적 정체성은 강제 이주, 정착, 그리고 무슬림으로서의 정체성이라는 세 가지 핵심 이미지에 의해 형성되었다. 1950년대부터 체르케스 민족 협회와 청년 클럽은 캅카스에서의 추방과 요르단에서의 재정착을 주제로 한 공연을 개최해 왔으며, 이는 현재 제라시 예술 축제(Jerash Festival of Arts) 등 주요 국가 문화 행사에서도 선보이고 있다.
체르케스인은 '아디게 하브제(Adyghe Xabze)'라고 불리는 전통 윤리 규범을 중시하며, 이는 존중, 명예, 환대, 책임감, 자제력, 규율 등의 가치를 포함한다. 이혼율이 낮고 일부다처제를 실시하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다.
주요 기관
1932년 설립된 체르케스 자선 협회(Circassian Charity Association)는 요르단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자선 단체로, 빈민 지원과 체르케스인 장학금 지원, 문화 보존 활동을 수행한다. 1944년 설립된 알아흘리 클럽(Al-Ahli Club)은 스포츠와 사회·문화 활동을 장려하며, 1993년 설립된 민속 위원회(Folklore Committee)는 전통 노래와 춤의 보존에 기여하고 있다. 2010년에는 국제 체르케스 문화 아카데미(International Circassian Cultural Academy, ICCA)가 설립되어 체르케스어 교육과 문화 유산 보존에 힘쓰고 있다.
주요 인물
- 사이드 무프티(Sa'id Mufti): 요르단의 9대 총리
- 이스마일 바북(Ismael Babouk): 초대 암만 시장
- 투잔 알파이살(Toujan al-Faisal): 정치인, 인권 운동가, 요르단 의회 최초의 여성 의원
- 모히딘 이자트 콴두르(Mohydeen Izzat Quandour): 작가, 영화 제작자, 음악가
- 암자드 자이무카(Amjad Jaimoukha): 체르케스 문화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