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흥사(王興寺)는 백제 사비 시대(부여)에 창건된 대규모 사찰이다. 백제 무왕(혹은 위덕왕)과 관련된 전설과 함께 백제 불교 문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로 평가받는다.
역사
- 창건 배경: 왕흥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백제 무왕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삼국사기》에는 무왕 35년(634년)에 왕이 사비를 지어 왕흥사라고 이름 붙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2007년 발굴된 사리장엄구의 명문을 통해 위덕왕(554년~598년) 때부터 창건이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무왕이 선화공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지 못하자, 절을 짓고 용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 절터 발굴: 1982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를 중심으로 발굴 조사가 계속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그 규모와 중요성이 확인되었다.
건축과 가람 배치
발굴 결과, 왕흥사는 전형적인 백제 사찰 양식인 1탑 3금당식 배치였음이 밝혀졌다. 이는 중심에 목탑이 있고 그 좌우 및 북쪽에 각각 금당이 배치된 형태이다. 또한 강당, 승방, 회랑 등 대규모 사찰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 목탑지: 특히 목탑은 기단 규모만 해도 동서 23.4m, 남북 23m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였으며, 이는 황룡사 9층 목탑 다음으로 큰 규모로 추정된다. 목탑의 구조는 기단부 밖으로 사방에 계단을 두어 오를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금당지: 목탑을 중심으로 북쪽, 동쪽, 서쪽에 각각 금당(주요 불상을 모신 전각)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각 금당에는 백제의 뛰어난 건축 기술이 반영되어 있었다.
주요 출토 유물
왕흥사지 발굴 조사 중 가장 큰 성과는 2007년에 목탑지 심초석 아래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이다.
- 사리장엄구: 이 사리장엄구는 금제 사리병, 은제 사리외함, 청동제 사리함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히 은제 사리외함의 옆면에는 백제 위덕왕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었다. 발원문에는 "정유년(577년) 2월 15일,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를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하였다"는 내용이 담겨 있어 왕흥사의 창건 시기와 주체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였다.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 앞선 시점으로, 백제 왕실 불교의 역사를 재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미 주었다.
- 기타 유물: 그 외에도 명문 기와, 금동향로편, 치미(건물 용마루 양 끝에 세우는 장식 기와) 파편 등 다수의 백제 시대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백제 불교 미술과 기술의 수준 높은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현재와 의의
현재 왕흥사지는 대한민국 사적 제42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백제 시대 사찰 건축과 불교 문화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비록 유네스코 세계유산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일부로 등재되지는 않았지만, 백제 후기 왕실 사찰의 면모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유적이며, 백제 불교 미술과 건축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출토된 사리장엄구는 국보로 지정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같이 보기
- 백제 무왕
- 백제 위덕왕
- 백제역사유적지구
- 사리장엄구
- 미륵사지
참고 문헌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왕흥사 발굴조사보고서』.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